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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정조 즉위 초기의 정국(政局)과 「홍국영 전성시대」 - I
    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2019. 5. 8. 14:08


      
      ■ 정조 즉위 초기의 정국(政局) - 1 
      
      모르긴 몰라도, 정조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그의 별명은 필시 ‘이짱’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홈페이지는 연일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팬클럽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짱 신드롬’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였을 거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는 가문 출중하고 학업성적 뛰어난데다 
      무술실력 또한 탁월한 '엄친아'였기 때문이다. 
      한데 이쯤에서 우려되는 점이 딱 한 가지 있긴 하다. 그의 외모와 관련하여서다. 
      혹자는 그의 이름을 들을라치면, 먼저 안성기(영화 ‘영원한제국’)나 이서진(드라마 ‘이산’) 
      같은 준수한 용모부터 떠올릴 런지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접해온 
      그의 용모 또한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마치 안성기와 이서진을 섞어놓은 
      얼굴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교과서에 실린 어진(御眞)은 정조의 실제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그건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일 뿐이다. 워낙 학식이 뛰어났던 임금이었던지라 
      성군(聖君)의 이미지를 강조하다 보니 ‘곱상한’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실제 어진이라 믿어지는 조선시대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에 담겨있는 정조의 얼굴은 
      그동안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정조의 얼굴과 사뭇 다르다. 아니,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전혀 딴판이다. 말하자면, 안성기나 이서진 쪽 보다 차라리 야인시대의 ‘무옥이’
      (개그맨 이혁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쪽에 더 가까운 외모인 것이다. 
      때문에 KBS-TV는, 이 어진에서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며 「무인(武人) 정조대왕」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작위적인 느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니 그 또한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각설하고, 그의 생김이 어떠하였든 조선 22대 왕 정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임금 중 하나였음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가 경연에서 날고 긴다는 대신들을 직접 
      가르쳤음을 증언하는 문헌이 적지 않을 뿐더러 활쏘기 실력이 신기에 가까웠다는 기록
      (어사고풍첩)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문(文)․무(武)에 
      두루 뛰어난 정조였지만, 그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기만 하였다. 
      조정을 접수한 노론세력의 노골적인 반대 속에서 온갖 위협과 고초를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다가는 자칫 연산군 때처럼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참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노론세력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손이 비록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였으되 그는 엄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사도세자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까지 목격한 당사자가 아니던가. 
      때문에 굳이 '삼종(세 임금)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경빈 박씨의 후손인 은전군이어야 한다는 것이 노론세력의 생각이었다. 
      나인시절 방애라고 불렸던 경빈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세력은 세손을 제거키로 하였다. 당시 세손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였으므로 이런 기회를 살려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선두에 
      홍봉한․홍인한 형제와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서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장인이 사위를 제거하려 할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세손의 편이었다. 세손의 어머니이자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의 제거를 결사적으로 막고 나섰던 것이다. 비록 권력유지를 위해 남편(사도세자)까지 
      버렸던 그녀였지만, 아들을 향한 모성애가 권력욕을 눌러버린 셈이었다. 
      이로 인해 딸 덕분에 정승자리까지 해먹었던 홍봉한은 잠시 주춤해졌지만, 홍인한은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홍인한은 세손의 작은 할아버지인 관계로 당초에는 
      세손 편에 섰었으나 탐욕이 많고 포학하다는 이유로 세손이 배척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 권세를 누리던 정후겸에게 붙으면서 세손의 ‘원수’가 된 인물이었다. 
      이로써 ‘이산 대리청정 반대투쟁위원회’는 홍인한과 정후겸의 ‘투톱체제’로 진용이 짜여지게 
      되었다. 홍인한은 장외(혹은 현장)투쟁을 담당하고, 정후겸이 지휘본부를 총괄하는 
      역할분담까지 그런대로 마무리지었다. 
      1775년 11월(영조 51년) 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영조가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
      "몸이 매우 안 좋으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알겠는가? 국사나 조사(조정의 일)를 
      제대로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해야 하는지를 알겠는가? 세손에게 전서하고 
      싶지만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좌의정 홍인한이 기다렸다는 듯 반대 주장을 피력하였다.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었다. 
      ‘왜 필요 없는지’ 따위는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현정화라 하면 그냥 현정화‘란 논리였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년) 12월 노환이 깊어진 영조가 신하들 앞에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을 때는, 현장투쟁 담당답게 영조 앞에서 ‘깽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세손까지 지켜보는 자리에서였다.「영조실록」은 당시의 어수선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어이그,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걸 확…. 영조는 내심 울화통을 터뜨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으리라. 하지만 82세의 ‘파파할아버지’인 영조로서는 더 이상 옥사를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그 대신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세손에게 순감군(巡鑑軍)의 지휘권을 넙죽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홍인한 등의 이산 즉위 반대투쟁은 계속되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머리에 '결사반대' 글자 선명한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영조의 침소 앞에 거적데기 깔고 
      드러누워 영조의 출입자체를 원천봉쇄하는 극단적 투쟁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늙으면 고집도 세진다고, 영조 또한 대리청정의 고집을 쉬 꺾지 않았다. 
      당시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자신의 명운(命運)이 다했음을 노인 특유의 직감으로 
      느끼고 있던 영조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더욱이, 이미 옥쇄 등도 세손에게 넘긴 
      상태였으므로 기실 공식적인 발표만 남겨놓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한데 좌의정이라는 자가, 더욱이 세손의 외할아버지란 자가 제 손자 놈이 임금 되는 걸 
      막기 위해 허구헌 날 ‘땡깡’이나 부리고 있으니…ㅉㅉ, 
      이래저래 영조의 시름은 깊어만 갈 따름이었다. 
      한편 ‘이반투위’ 지휘본부에서 이 모든 상황을 체크하고 있던 정후겸은 정공법만으론 
      세손을 제거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 썼던 변칙공격까지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손이 민가에 돌아다니며 금주령 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한편, 세손의 시중을 드는 내관들을 꾀어 음탕한 놀이를 
      권하게 하는 방식 등으로 세손이 결코 왕재(王才)가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행히 세손은 이 꾐에도 쉬 넘어가주질 않았다. 하지만, 단 한번 위기가 닥쳐온 적이 있었다. 
      세손이 당시 금기시 되었던 ‘시전요아편(詩傳蓼莪篇)을 읽다가 영조에게 걸릴 뻔 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한 이후 시전요아편을 읽지 못하도록 특별 분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요아편에는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자칫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은 세손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으니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여도 다 할 수가 없구나」(父兮生我 母兮鞠我 欲報深恩 昊天罔極) 같은 대목이 
      그것이었다. 한데, 세손이 바로 이 구절을 읽고 큰 슬픔에 젖어 눈물 콧물을 짓이길 즈음 
      이 장면을 목격한 내관이 쪼르르 영조에게 달려가 냉큼 고자질해버리고 말았다. 
      영조는 크게 노하여 대뜸 세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세손이 앉은 앞에서 내관에게 
      방금까지 세손이 보고 있던 책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세손은 당황하였다. 
      급히 부름을 받고 오느라 시전요아편을 그대로 펼쳐둔 채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관이 가져온 시전에는 요아편 부분이 오려져 있었다. 
      이때 시전의 요아편을 잘라내 세손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때마침 동궁에 들렀던 그가 급히 어전에 불려가는 세손의 행보를 이상히 여기고 
      세손의 방에 들어가 보니 시전요아편이  펼쳐져 있는지라 
      그 부분을 미리 칼로 오려내 두었던 것이다. 
      영조가 그 부분이 오려진 연유를 묻자 세손은 엉겁결에 그 책을 읽지 말라는 분부 때문에 
      그러하였노라고 대답함으로써 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었다.(정조는 세손시절의 
      ‘존현각일기’에 홍인한과 정후겸 등 특권외척들이 자신이 어떤 공부와 대화를 하는지 항상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왕위계승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공세를 멈출 노론이었다면 이들을 애초에 노론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세손을 마치 ‘손안의 공기돌(手中之物)’ 정도로 여기며 
      이후로도 끊임없이 모함과 위협을 가해왔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마다 엿보고 탈취했으며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정조의 ‘존현각일기’ 중에서> 
      정적들이 끊임없이 감시하고 위협하는 이 시기 정조는 죽고 싶은 심경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노론들의 노골적인 반대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홍인한의 
      극렬한 반대는 점점 그 도를 더해 가기만 하였다. 영조나 세손에게 있어 홍인한은 그야말로 
      ‘웬수 중의 상웬수’ 같은 존재였으나 그를 따르는 무리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한숨만 
      푹푹 토해낼 뿐 달리 어쩔 도리도 없는 난감한 형국이었다. 
      이처럼 홍인한․정후겸 등 노론 외척당의 모함이 정도를 넘어 급기야 왕세손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질 즈음, 세손으로 하여금 그들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하는 
      '회심의 한방’이 터졌다. 스물일곱 살의 소론계 공신 서명선이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의 전횡을 폭로하는 상소를 전격적으로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는 세손이 영조에게 직접 올리려고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선이 정민시․
      홍국영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그 위험부담을 혼자 떠맡고 나섰던 것이다. 
      때는 1776년 1월하고도 하순이었다. 
      영조는 원임대신들과 양사 그리고 상소문의 장본인 서명선을 부른 후 서명선으로 하여금 
      직접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였다. 서명선은 하등의 망설임 없이 상소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홍인한의 '삼불필지설'에 대하여 신랄히 비판하는 한편 
      영의정 한익모가 하였다는 '좌우는 걱정할 것 없다(산하들이 잘 하고 있으니 대리청정은 
      필요 없다)'는 말에 대하여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서명선의 상소가 끝나자 영조는 대신들에게 
      상소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영조의 물음에 모호한 답변만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이에 흥분한 영조가 다시 한 번 다그쳤으나 대신들은 
      '여론을 잘 알지 못해 대답을 못하겠다(김상복)'는 등 
      여전히 모호하게 말을 돌리며 시비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다. 
      격분한 영조는 중추부영사 김상복과 판중추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켜버렸다. 
      그리고 한익모와 홍인한의 이름을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지우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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