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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5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5. 2. 22:23



    
    ■ 國喪 중에도 官妓와 성행위 
    
    국상 때는 원래 기생과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법이지만, 
    법이 있다고 해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록에도 국상 중에 기생과 관계하다가 처벌된 사례가 무수히 보인다.
    예컨대 성종 4년 8월27일 안철손(安哲孫)은 국상(國喪) 중에 감사(監司)로서 관기(官妓)를 
    마음대로 간통하여 홍주(洪州) 온 고을이 시끄러웠고, 충청도 온 도가 시끄러웠으며, 조정이 떠들썩하여 
    성상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안철손의 처벌문제를 두고 한동안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생 쟁탈, 상중의 성행위, 간통, 부녀의 강간 등의 행위는 양반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일이었다. 
    기생 점유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황상과 김우의 가희아 쟁탈전이 문제가 된 것은 군사를 동원해 백주대로에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세상에 알려질 일도 아닌 사건일 뿐이었다. 이 사건을 접한 태종의 말을 들어보자. 
    “내연(內宴)에 정재(呈才, 조선 때 대궐 잔치에서 하던 노래와 춤)하는 상기(上妓)를 간혹 
    제 집에 숨겨두고 제 첩(妾)이라 하여 항상 내보내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일찍이 얼굴을 아는 기생도 
    내연에 혹 나오지 않는 자가 있어, 정재에 결원이 생긴다.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제 집에 숨겨두고 ‘제 첩이라’고까지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태종 7년 12월2일). 
    정재는 궁중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 등 연예를 보이는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기생은 공노비(公奴婢) 신분이다. 개인이 점유할 수 없게 돼 있었다. 
    따라서 기생의 독점은 불법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궁중의 정재에 필요한 인원을 채우지 못해 
    임금이 한탄할 정도로 기생을 특정 양반이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일이 유행했던 것이다. 
    며칠 뒤 태종은 사헌부 장령 탁신(卓愼)을 불러 명령하였다. 
    “이제 들으니, 상기의 연고로 말미암아 탄핵을 당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전날 내가 말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제 집에 숨겨두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고, 
    조관(朝官)이 상기를 첩으로 삼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기생을 불법적으로 독점하는 경우가 많아 처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반들의 기생 독점은 처벌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세종 원년 평안도 감사 윤곤(尹坤)은 지방관들이 관기(官妓)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엄금할 것을 
    건의한다. 윤곤이 묘사한 양반 관료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음은 이를 요약한 것이다. 
    “대소 사신(使臣)이 왕명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면,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져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이 허락하는 한 즐긴다. 만약 기생과의 즐거움이 흡족하지 않으면, 해당 지방 수령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험 찾기로 없는 죄를 찾아내어 죄망(罪網)에 몰아넣는다. 지방 수령의 경우도 
    법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이상, 사신이 성적 상납을 요구하면 법에 의해 처리해야 할 것이지만, 
    서울서 귀한 사람이 오면 강제로 관기와 성관계를 갖게 하며, 순응하지 않는 관기는 무겁게 처벌한다. 
    더욱 비인간적인 것은 모녀와 자매를 모두 기생으로 만들고, 한 사람이 두루 성관계를 갖는 경우다. 
    명사들끼리나, 한 고을 안에서 서로 좋게 지낸다는 자들도 기생 하나를 놓고 다투어, 서로 틈이 벌어져 
    종신토록 다시는 좋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 
    윤곤은 특수한 사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화된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윤곤이 관기 제도 자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제공하는 관기 제도를 존속시키되, 
    사신이나 귀한 손님이 간음하는 것을 금지하고, 어기는 경우 주객(主客)을 모두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예조에 명하여, 의정부·육조와 상의하여 대책을 만들어 올리게 한다. 
    후일의 자료를 보건대, 대책은 일단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세종 20년 11월23일 사헌부는 기생을 첩으로 삼는 일을 일절 금지할 것을 요청한다. 
    다시 기생 점유에 대한 제한책이 나왔던 것이다. 제안 이유를 들어보자.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관리로서 창가(娼家)에서 자는 자는 장 60대에 처하고, 
    관리의 자손으로서 창가에 자는 자도 죄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국의 대소 관리는 기생으로 첩을 삼아서 음란하고 더럽고 절개가 없다. 
    뿐만 아니라, 기생 때문에 부부가 반목하고 부자 형제 사이가 벌어지고, 대대로 향화(香火)의 신의와 
    금석(金石)의 교제를 닦아오던 터이라도 서로 시기하고 몰래 중상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 탐오(貪汚)하여 장물을 범하는 자들은 대개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기생에 대한 탐닉은 거의 일반화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 사신은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때에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기생첩으로 집안 일을 관리하게 하여 적처(嫡妻)와 다름이 없는 자가 
    꽤 많이 있었으므로, 혹은 이로 인하여 장물죄를 범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구타하여 상해(傷害)를 입히기도 하여, 서로가 원수가 되어서 
    선비의 풍속이 불미하였던 까닭으로 이러한 청이 있었던 것이었다.” 
    기생을 점유하여 첩으로 만드는 풍조는 가정을 붕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세종28년 5월23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국상(國喪) 중에 어떤 벼슬아치가 기생 만환래(萬喚來)의 집에 
    들어갔다가 본부(本夫)에게 쫓기어 상복(喪服)까지 빼앗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세종은 “관리가 창기(唱妓)의 집에서 자는 것은 
    실로 더러운 행동이나, 사풍(士風)이 이를 보통으로 안다”고 
    개탄하고 있으니, 저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세종 28년 1월30일에 다시 기생 점유문제가 불거졌다. 
    사헌부는 조관(朝官)으로 출사하는 사람이 창기와 관계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우의정 하연(河演)은 “대소 사신(使臣)과 수령들은 
    음욕(淫欲)을 마음대로 행하여 폐를 끼침이 매우 많았다”고 말한다. 
    하연 역시 사헌부의 요청을 따라야 한다고 청했지만, 
    실록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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