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대부 가문에서 간통사건 다반사
어우동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풍성하지만, 대부분은 관련자들의 처벌 문제에 관한 것이고,
어우동의 남성 편력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어우동의 행적은 어우동이 교형을 당한
그 날짜의 실록 (성종 11년 10월18일)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자료를 근거로
어우동의 행각을 조금만 언급해보자.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결혼했다.
태강수 이동은 임금의 종친이다. 어우동은 당당한 사족의 딸로 종친에게 시집을 갔으니,
지체가 높았다. 그러나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강수가 어우동을 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태강수가 은장(銀匠)을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에 호감을 품고 계집종 옷을 입고 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남편이
내쫓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우동이 쫓겨난 내막이지만 자세한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남편에게서 쫓겨나 친정집에 머무르던 어우동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은 계집종이었다.
계집종은 어우동에게 오종년이란 사람을 소개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족계(族系)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오겠습니다.”
계집종은 오종년을 데리고 왔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의 ‘실록’은 어우동이 먼저 유혹하거나 혹은 유혹당하기도 하면서 오종년을 시작으로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근지,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학록 홍찬,
서리 감의향, 밀성군의 종 지거비 등과 관계를 맺은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윤리학이다.
삼강오륜은 그 윤리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윤리적이라는 사회에서 유감동과 어우동은 얼핏
돌출적인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감동과 어우동의 출현은 전혀 돌출적 현상이 아니었다.
세종 18년 4월20일 이석철(李錫哲)이 처제인 종비와 통간한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세종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간통사건들을 떠올린다.
“변중량(卞仲良)의 누이동생, 가노(家奴)와 간통. 유은지(柳殷之)의 누이동생이 중과 비밀히
간통하고, 가노 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꺼려서 다 죽임. 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지신사 조서로(趙瑞老)와 간통. 승지 윤수(尹須)의 아내 조씨(趙氏)는 고종사촌 홍중강
(洪仲康)과 장님 하경천(河景千)과 통간하였으므로 역시 극형에 처함. 금음동(今音同)과 동자
(童子)는 모두 양가의 딸로서 혹은 종형과 통간하고, 혹은 외인과 통간하여 풍속을 문란케 하였으므로,
율에 따라 결죄(決罪)하고 천인으로 내침. 유장(柳璋)의 딸인 안영(安永)의 아내는 고종사촌 홍양생
(洪陽生)과 통간. 이춘생(李春生)의 딸인 별 시위 이진문(李振文)의 아내(어리가)는 부사정 이의산
(李義山)과 양인 허파회(許波回)와 통간함.”
이것들은 세종의 기억에 간직된 것이고 또 사건화된 것이니,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일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감동과 어우동은 결코 돌출적 존재가 아니었다.
조선사회는 간통이 다반사로 일어난 사회였다. 도덕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세종 15년 어리가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기록을 참고하자.
어리가는 병조참판 이춘생의 딸이고 별시위 이진문의 아내였다. 양반 중의 양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리가는 “양반집 부녀로서 상복(常服)을 입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함부로 음란한 행동을 하여
이의산과 비첩(碑妾) 소생인 허파회와 간통”했다 (세종 15년 11월25일).
사건이 알려진 뒤 어리가는 해진(海珍)에, 이의산은 기장(機長)에 안치되었고,
허파회는 영북진(寧北鎭)에 충군(充軍)되었다 (세종15년 12월5일).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헌부는 이런 말을 한다.
“본조(本朝)에서는 사족의 집 부녀는 나갈 때에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수레를 타게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지하고 막는 것이 지극히 엄중한 것은 여염 부녀자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도덕적 금제(禁制)가 완강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간통사건이 자주 발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론은 자명하다. 이슬람의 율법 같은
조선의 도덕적 금제보다 성적 욕구를 분출하려는 남성들의 행동이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성관계란 남녀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자끼리의 성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성적 소수자(小數者)의 일이다.
따라서 감동과 어우동 사건은 여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남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우동을 성적 이상자라고 한다면(이것이 감동과 어우동을 치죄한 근거였다),
양반계층의 남성들이야말로 더 확실한 성적 이상자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원하기만 하면 성적 상대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자식을 많이 보아 왕실을 튼튼히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여성이 임금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승은(承恩)’, 곧 은혜를 입은 것으로 표현됐고,
그들은 이내 후궁이 되었다. 제왕이 정비(定妃) 이외에 후궁을 많이 차지하는 것을 두고
간통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통은 제도를 만드는 사람의 권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감동과 어우동을 비난하고 처벌했던 양반들의 성 문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흔히 고려 말의 도덕적 타락상을 들지만, 조선 전기 양반들도 고려에 못지않았다.
성종 20년의 일이다.
왕은 의정부·육조 판서·경연 당상·승지·홍문관 예문관 등의 고급관료로 하여금
장악원에 모여 달 구경을 하게 하였다. 음력 8월15일 한가위의 밤이었다.
임금은 술과 음악을 하사했다.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사신의 평이 실려 있다.
“임금이 근신(近臣)을 우대하여, 은례(恩禮)가 심히 융성하였다.
이날 밤에 여러 신하가 회음(會飮)하였는데, 마침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어
어두컴컴하고 밝지 아니하니, 승지 조극치(曹克治)가 기생을 데리고
청사(廳事)에서 음행(淫行)하였다” (성종 20년 8월15일).
8월15일은 만월이지만, 마침 구름이 달을 가렸다.
야음을 이용하여 승지 조극치는 임금이 주최한 파티에서 기생과 성행위를
벌였던 것이다. 조극치는 사신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조극치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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