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 드디어 출사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달인 효종 즉위년 6월, 송시열은 드디어 출사길에 올랐다.
김집, 송준길, 권시 등과 함께였다.
효종은 "송시열은 지난날 나의 사부였으므로 그리운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니
이런 내용을 갖추어 서술하여 부르라"면서 대군 시절 사부였던 최온을 함께 불렀던 것이다.
효종은 출사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세자시강원 진선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자
3일 만인 효종 즉위년 6월 19일에 정4품인 사헌부 장령을 제수할 정도로 그들을 우대했다.
송준길과 송시열, 양송에게는 율곡의 학통을 이은 산림의 적자라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송시열의 나이 만 42세 때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무려 12년 만에 출사한 송시열은
불과 20일도 안 된 6월 26일 벼슬을 내던지고 떠나고 말았다.
'효종실록'은 송시열이 입대를 청했는데 "이때 마침 상께 병이 있어 접견하지 않으니
시열은 대청에서 조복을 벗고 곧장 국문으로 나아가 상소하고저 떠났다"고 적고 있다.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의 '연보'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효종은 송시열이
유계 등이 이미 논란을 벌였던 인조의 묘호문제를 다시 거론할 것을 우려해
병을 핑계로 인견을 거부한 것이었다.
인조의 묘호에 어질 인자를 쓰려 하자 부수찬 유계가 이미 제12대 임금
인종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효종은 이 문제를 인종의 종 대신에 조를 씀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는데,
'공은 조', '덕은 종'이란 말처럼 '조'자는 왕실의 시조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큰 공로가 있는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으므로, 유계 등이
'혐의를 분별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며 논란을 벌였던 것이다.
송시열이 사직하고 떠나자 효종은 평소 우암과 친한 동부승지 김익희를 보내 다시 불렀으나
송시열은 상소 한 장을 봉입한 채 떠나고 말았다. 이 상소에서 송시열은
"군사를 닦고 준비하여 외적으로부터 수모를 막을 것" 등 13개 조목을 역설했다.
나중에 다시 출사하여 이 13개 조목을 부연 설명한 것이 바로 유명한 '기축봉사'이다.
효종이 인견하지 않는다 해서 조복을 팽개치고 내려간 사건으로 송시열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효종실록'에도 그 비난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시열을 알아주어 특별히 융숭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인견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관직을 박차고 귀향하니 듣는 사람이 다 지나치다고 여겼다."
사실 과거 급제자도 아닌 그에게 정4품인 사헌부 장령을 제수한 것을 파격적인 배려였다.
그럼에도 임금이 인견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벼슬을 팽개치고 돌아간 것은
지나치게 거만한 처사가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던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그의 당인 산당에서는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친구 이유탵가 그를 변호한 데 이어 산당의 영수인 김집도 송시열을 거들고 나섰다.
"시열이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사저)에서 오래 모셨으니
이 사람의 성품이 강하고 행동이 과감한 것을 전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좌우에 두고 다듬어 쓰시면 반드시 보탬이 될 것입니다."
공조 좌랑 송시열의 동문인 이유태가 상소하고, 교리 유계, 소복양 등이 옥당에서
거듭 상차를 올려 송시열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자 효종은 다시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권고를 받고 조정에 다시 나와 효종을 만났다.
효종 즉위년 10월 6일이었다.
출사를 둘러싼 효종과의 한판 승부에서 송시열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대군사부로 봉림대군을 교도한 이후 실로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만 17세의 소년 봉림대군은 만 30세의 효종이 되어 있었다.
만 29세의 청년 송시열은 만 42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다시 조정에 나온 송시열은 그러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봉사'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이 기축년이므로
'기축봉사'라고 부르는 글이다.
봉사란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하여 임금에게 바치는 글을 뜻한다.
송시열이 굳이 봉사의 형식을 띤 것은 '정자와 주자의 소장이 황색으로 밀봉해 올렸기'
때문에 이를 본뜬 것이었다. 송시열은 '봉사'를 올리는 이유를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라며 정자와 주자는 모두 황첩을 썼지만
효종이 상중이기 때문에 백첩으로 올린다고 말했다.
과연 기축봉사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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