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북벌
흔히 송시열을 극단적인 북벌론자로 많이 이해한다.
사실상 그는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증오했다.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것을
'갓 대신 신을 머리에 쓴 것'으로 여겼다. 그가 청나라에 저항한 많은 인사들의 전기를 쓴 것도
그의 숭명의리의 표현이다. 그는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해 청나라에 끌려간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전기인 '삼학사전'을 비롯해 '임경업 장군전'을 썼으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호군 김종윤전', 의병장인 '증 병조참판 장윤전' 등 대의를 지킨 많은 인물들을 기렸다.
이순신 장군 전승비인 '남해노량 충무공 묘비'를 쓴 인물도 바로 송시열이다.
이는 그의 춘추대일통 사상을 구체적인 인물 속에서 기린 글들이다.
그가 이처럼 의리를 강조하고 또 북벌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제 행적을 고찰해 보면
송시열이 실제로 북벌을 추진할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자 2만여 자에 달하는 '기축봉사'에는 북벌에 대한 송시열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시종일관 주의, 즉 주자를 칭송한다. 그 중 몇 구절을 보자.
"예전에 주자가 행궁에 나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났더니 그가 경계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말은 임금께서 듣기 싫어하는 바이니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자 주자는, '내 평생에 배운 것이라고는 정심성의 네 글자뿐인데
어찌 감히 간사하게 말을 돌려 우리 임금을 속이겠소'라고 거절했습니다.
이제 신도 감히 다른 말로 고명하고 순수한 성학을 저버리지 못하겠으므로,
감히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송시열에게 주희의 한 마디 한 움직임은 그대로 전범이었다.
송시열은 이런 기조 위에서 북벌을 피력했다.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은 공자가 '춘추'에서
대일통의 의리로 천하 후세에 밝힌 바이므로 무릇 혈기 있는 사람치고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추하게 여겨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
또 주자는 '인은 부자보다 큰 것이 없고 의는 군신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것이 삼강의 요점이요'
'군부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효종실록'은 송시열이 봉사란 비밀 상소문 형식을 띤 상소문을 올린 것은
'기축봉사'를 일관하는 대일통 사상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공자의 대일통은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란 사상이었다. 고대 중국 주나라 이외의
모든 민족은 오랑캐요 금수이므로 중국과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이다.
송시열의 기축봉사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주희가 남송의 효종에게 올린
'임오응조봉사'를 본뜬 것이었다. 주희는 '임오응조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한번 정하면 결코 바꾸지 못할 계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
오랑캐 금나라는 우리와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봉사'라는 상소형식과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주장은
주희의 말에서 그대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주희와 송시열은 수백 년의 세월과
수천 리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기본 사상은 완전히 같았던 인물들이었다.
문제는 주희에게 대일통은 그대로 남송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자기 중심적 사상이지만
송시열에게 대일통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사상면에서 볼 때 송시열의 북벌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명나라를 따르자는 대일통 사상이다.
송시열이 말한 군신의 의리는 인조의 삼전도 치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므로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금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대일통 사상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과 같은 시기에 창업하시고
즉시 군신의 의를 맺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충정의 절개를 지킨 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히 지난번에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게 온 나라를 삼켜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가 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에 더럽혀졌으니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명 태조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긴 것이 변할 수 없는
군신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의 의리론이다. 즉 그에게 의하면 조선은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 삼강의 의리이다.
"우리 나라는 실로 신종황제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 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 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 그런즉 오늘날 온 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광해군이 이런 분함을 잊고 강홍립을 시켜 전군을 포로로 만들어서,
천하 사람들이 우리 나라도 오랑캐가 되어버렸다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대행대왕(인조)께서 의를 주창하시고 반정하셔서 대의를 밝히시니
세상이 해와 달같이 밝게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거듭 대행대왕께서 지성으로 위(명나라)를 섬기셔서
매양 은총과 칭찬을 받음이 종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갑자기 북쪽 오랑캐의 협박을 당해 충성된 절개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 이후의 일은 신자로써 차마 말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이처럼 우리 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구구절절 더 슬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시열에게 있어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그에게 대일통, 즉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 송시열의 북벌론과 효종의 북벌론
그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명이 망한 후에도 명의 그림자만을 잡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명이 망한 후 중화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잡저'에 실린 그의 글을 보자.
"중국인들은 우리를 동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또한 이유가 있다. 맹자는 '순은 동이 사람이며, 문왕은 서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순 또한 성인이므로 공자와 맹자가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근심할 것은 없다.
엣날 칠민은 남이의 지역이었는데 주자가 이 땅에서 일어난 후에 뒤바뀌게 되었다.
땅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이가 살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조선이) 중국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중국이란 고정된 특정 지역이 아니라 도가 행해지는 지역을 뜻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가졌던 이른바 '소중화 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송시열이 사대주의자인 점은 분명하지만 '소중화 사상'은 그를 단순히 맹목적인
사대주의자로 보는 시각에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 그가 효종같은 군사적
북벌론자들과 사상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군사적인 북벌에는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소중화 사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세치 혀로만 북벌을 높인 것이었다. 그는 군사를 동원하는 실질적 북벌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북벌에 대한 그의 실제 생각을 '기축봉사'에서 보자.
"오늘날 시세를 따지지 않고 강한 오랑캐를 가벼이 끊으면 원수를 갚기도 전에
화가 미칠 것이니 이는 역시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낮추시어 굴복하심으로써
종묘사직을 연장시키신 본의가 아닙니다...
이런 독한 마음을 잊지 마시고 그 원한을 차곡차곡 쌓으셔서 평소의 온화한 말 가운데에도
그 깊은 곳에는 분노가 더욱 쌓이게 하십시오. 또한 부귀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언제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굳은 뜻을 5년, 7년, 10년, 20년이 지나도록 결코 풀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
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서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의 말하는 북벌은 조선이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능한 북벌 의리는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즉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송시열이 바랐던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결국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 무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무력 북벌론이 아니라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 북벌론,
제한적 북벌론이다. 말하자면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뒤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의 정체성만은 끝내 지키자는 자기 정체성론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정권의 이론가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현실 외교를 무도라고 비판하여 반정한 결과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
서인정권으로서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을 무력으로 정벌할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진퇴양난이었다.
그 진퇴양난이 만든 묘수가 말하자면 '소중화 사상'이요 '대일통 사상'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달랐다. 효종은 명분론자가 아니라 현실론자였다.
효종에게는 송시열처럼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끊고 이미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따위의 명분적 북벌론, 허구적 북벌론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효종에게 북벌은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글자 그대로 '북벌'이었다.
효종은 명분만의 허구적 북벌이 아니라 실제적 북벌을 추구했다.
북벌의 수행만이 소현세자와 그 아들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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