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의 급서와 문제 많은 장례 절차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으로 불과 3개월 전에 의관에 특채된 인물이란 점에서 의혹은 더했다.
그의 특채 시점이 세자의 귀국 시점이란 것과 그의 특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소용 조씨라는 점이 의심을 증폭시켰다.
소용 조씨와 세자 부부가 불편한 사이였음을 모르는 궁중 사람은 없었다.
세자가 죽은 후 인조가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서자 의혹은 당연히 인조에게 쏠렸다.
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잘못의 유무를 떠나 시의들을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현세자 같은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사에서 이형익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의원 이형익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허탄한 의술을 스스로 믿어서 세자의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학질 걸린 세자에게 침만 놓다가 사흘 만에 사망케 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을 반대하며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섰다.
양사에서 재차 국문을 청했으나 인조는 결코 따르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었다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시록' 23년 6년 27일자에도 나온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시신이 까맣게 변하거나 얼굴의 눈, 코, 귀 등 구멍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신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목격담은 소현세자의
생모 인열왕후의 서제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내척의 자격으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다.
인조가 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사실은 장례 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재궁(임금.세자의 관)'이란 호칭을 못 쓰게 하고
대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자를 쓰도록 했다.
세자시강원의 보덕 서상리의 주장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이요
죽어서는 빈궁이 되므로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무덤의 이름도 원자 대신에 묘자를 쓰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원자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만 쓸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자를 역대 임금의 무덤에 써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용렬하고 저주에 가득 찬 인조의 명분 없는 억지였다.
상복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례에 따르면 장자의 상에는 부모가 참최복, 즉 3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나 영상 김류, 좌상 홍서봉 등 서인 중신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기년복,
즉 1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이 자체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 했다. 역월법은 연산군이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용했던, 성리학 사회에서는 패륜적인 예법이었다.
그나마 인조는 12일을 한 등급 더 감해 7일 만에 상례를 마쳤다.
3년상이 7일상이 된 것이다.
최소한 재최 1년복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도 3개월 단상으로 결정했다.
옥당에서 3개월 단상은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유신 송준길의 이 비판은 인조에게
뼈아픈 것이어서 인조는 상소에 대한 비답도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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