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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창 표씨(新昌 表氏)
    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2019. 4. 19. 19:32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신창 표씨(新昌 表氏)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표대박(表大㺪)은 후주(後周)의 이부상서(吏部尙書)로 960년(광종 11)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합문지후(閤門祗侯),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올라 
      온창백(溫昌伯)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1세조로 한다.
      ◎관향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시조 -표대박(表大㺪)
      ◎주요 중시조 -표인려(表仁呂)
      ◎주요 인물 -표연말, 표빙, 표헌, 표정로, 표정준, 표양문, 표영준, 표희선, 표현명, 표민수
      ◎인구(2000년) -24,822명 (212위)
      ● 역사
      중국 오계시대(五季時代)에 후주(後周)의 이부 상서(吏部尙書) 표대박(表大㺪)이 후주가 멸망하자 
      960년(고려 광종 11년)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姓)과 함께 고려에 귀화(歸化)함으로서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올라 온창백(溫昌伯)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시조
      (中始祖 : 1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본관 연혁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溫陽)에 속하게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신창을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되어 영현(領縣)
      으로 삼았다. 그 후 조선에 와서는 태조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
      (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으로 승격되어 홍주부 아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아산군 학성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17년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1995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이 되었다. 
      ● 인물
      표연말(表沿沫, 1449년 ∼ 1498년)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 아버지는 감찰 표계(表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司議)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 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
      (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서거정(徐居正)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논학(論學)」이라는 
      글에서 김종직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되어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
      『남계문집』4권 2책이 전한다.
      표빙(表憑, ? ∼ 1524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중(敬仲), 호는 퇴우(退憂). 아버지는 직제학 표연말(表沿沫)이며, 
      어머니는 호군 이종림(李從林)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상관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1515년 김안로(金安老) 등과 사가독서
      (賜暇讀書)한 뒤 정언, 이듬해 수찬에 이어 다시 정언이 되었다. 그 해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을 
      통틀어 50명의 사유(師儒)를 간택하였는데 김안로·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에 뽑혔으며, 
      노산군(魯山君 :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진언하였다. 1517년 헌납이 되었고, 
      그뒤 교리를 거쳐 1520년에는 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장령·홍문관응교를 거쳐, 1523년 전한이 되어 
      응교를 겸하였다. 그 해 검상에 임명되었으나 경연(經筵)의 3품관이 5품직에 임명됨은 부당하다는 
      논란이 있었으며, 왜(倭)와의 싸움에서 패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패군지사추고경차관
      (敗軍之事推考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충청도에 다녀와 사인이 되었다. 
      1524년 다시 전한이 되었고, 이어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표헌(表憲) :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 선조대의 어전통사(御前通事)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설연(設宴)하는 데 있어 임기응변적 통역과 조처로서 왕의 곤경을 모면하게 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고, 명나라 경략사(經略使) 송응창(宋應昌)의 전략수립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596년(선조 29)에는 진위사(陳慰使)로, 1597년 고급사(告急使)의 통역관으로도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에는 염초(焰硝)의 법을 배워와 전쟁수행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표정로(表廷老) :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 
      아버지는 표헌. 선조 때 그가 원접사(遠接使)의 역관이 되어 의주에 가 배 위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에, 명나라 사신이 그의 문장을 떠보기 위하여 은행(銀杏)을 운(韻)으로 시를 지으니, 
      그는 즉석에서 석류(石榴)를 운으로 하는 시로써 대답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크게 놀라면서 
      조선을 문헌(文獻)의 나라라고 극찬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지중추부사까지 지냈다. 
      그는 의표(儀表)가 수걸(秀傑)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표정준(表廷俊) : 조선 후기의무신.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첨사(僉使)를 역임하고,
      뒤에 현감에 이르렀다.
      표양문 : 초대 인천시장, 3대 국회의원
      표진인 : 의학박사
      표창원 : 범죄심리학자
      ● 과거 급제자
      신창 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명, 무과 급제자 17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표계(表繼) 표빈(表贇) 표빙(表憑) 표연말(表沿沫) 표연말(表沿沫) 표영중(表永中)
      무과 
      표개불(表介佛) 표계백(表啓白) 표계의(表啓義) 표관(表寬) 표성(表偗) 표세건(表世建) 
      표세건(表世建) 표신국(表信國) 표암로(表巖老) 표익점(表益漸) 표인검(表仁儉) 
      표정준(表廷俊) 표종일(表終一) 표중화(表中華) 표창언(表昌彦) 표철주(表哲柱) 
      표효선(表孝善)
      생원시 -표연말(表沿沫)
      진사시 -표대규(表大奎) 표빈(表贇) 표연근(表連根) 표연말(表沿沫)표정구(表廷耉)
      역과 -표헌(表憲)
      ●인구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창표씨는
      1985년에는 총 5,629가구 23,613명,
      2000년에는 총 7,805가구 24,82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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