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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산 피씨(槐山皮氏)
    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2019. 4. 17. 15:40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괴산 피씨(槐山皮氏) 
      
      ■ 충청북도 괴산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피경연(皮慶延)은 중국 원나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고려에 망명하여 공민왕이 
      괴산군(槐山君)에 봉하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도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한 피득창(皮得昌)을 중시조로 한다.
      ◎관향 -충청북도 괴산군
      ◎시조 -피경연 (皮慶延)
      ◎주요 중시조 -피득창 (皮得昌)
      ◎인구(2000년) -2,204명 (314위)
      ● 기원
      『조선씨족통보』에 따르며 피씨(皮氏) 연원에 대해서 중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성씨로 나타나 
      있으며 주나라 경사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功名:공을 세워 널리 알려진 이름)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자(皮字)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뒤 진나라 효제때 피초(皮初)라는 사람이 위문장을 지냈다고 하며 당나라 때 피일휴와 
      그의 두아들 피중업, 피광업이 문명을 떨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 시조
      괴산 피씨(槐山皮氏)의 원시조 피경연(皮慶延)은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피기광(皮起光), 
      호는 청피(靑陂)이다. 『정미보(丁未譜)』에 의하면,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神慶衛大將)이 되어 남변을 정벌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고려에 망명해 왔다고 한다. 
      공민왕이 특별히 그를 괴산군(槐山君)으로 봉해주었으므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의 5세손 피득창(皮得昌)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피득창은 전라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에 올라 
      이름을 떨쳤으며 괴산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후손들이 피득창을 중시조로 삼고 괴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 본관 연혁
      괴산(槐山)은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금물노국(今勿奴國)과 잉근내군(仍斤內郡) 
      이었다. 고구려시대인 475년에는 잉근내현·상모현(上芼縣)·도서현(道西縣) 등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괴양현(塊壤縣)과 도서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괴주(槐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995년(성종 14)에는 괴주군(槐州郡)으로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으나 1018년(현종 9)에 충주목(忠州牧)에 편입되면서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분리하여 
      1456년(세조 2)에 괴산군(塊山郡)이라 고쳐 불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에 속하였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풍군(延豊郡)과 청안군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의 군을 이루었다. 1979년 괴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 인물
      고려 때 피명재(皮命載)는 평장사를 역임했으며 괴원군(槐原君)에 봉해졌다. 
      역시 고려 때 피인영(皮仁榮)은 문하시랑, 피성무(皮成茂)는 이부상서를 각각 지냈다.
      피득창(皮得昌)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감사를 지낸 후 괴산군에 봉해졌다. 
      피득창의 아들 피강지(皮康芝)는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피정(皮釘)은 진사를 역임했다. 
      증손 피소(皮燒)는 목사를 역임했다.
      피홍군(皮洪君)은 판서, 피경송(皮卿松)은 통덕랑, 피동현(皮洞鉉)은 방어사를 각각 역임했다. 
      통정대부 피종남(皮宗南)과, 판관 피세만(皮世萬), 통사랑 피세담(皮世淡)도 유명하다. 
      효자로 칭송을 받은 피운손(皮雲遜), 통덕랑 피경우(皮景祐), 
      참봉 피봉준(皮鳳俊)도 가문을 빛냈다. 
      피정만(皮正滿) 조선조에서 영장을, 피능화(皮能和)는 첨사를, 피천백(皮川栢)은 
      주부를, 피선원(皮宣源)은 목사를 각각 역임했다.
      조선 영조 때 피보혁(皮普赫)은 공신에 임명되고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영조 4년 이인좌가 스스로 대원수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는 안음과 합천 등의 
      수령을 쫓아내는 등 세력이 커졌다. 이때 성주목사의 지휘 하에 반군을 진압하게 되었다. 
      당시 안사(按使) 황준이 피보혁을 추천하여 지례, 거창, 고령의 3현군을 거느리고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창은 이미 반군이 점거했기 때문에 피보혁은 나머지 2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군을 치며 동시에 반군에 가담한 자들을 회유했는데 그 쪽에서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 항렬자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경(景) 예(禮) 봉(鳳) 호(浩) 상(相) 찬(燦)
      ● 세계표 시조 1세 피경연(皮慶廷)- 2세 피명재(皮命載)- 3세 피인영(皮仁榮)- 4세 피성무(皮成茂)- 5세 피득창(皮得昌)-6세 피강지(皮康芝)- 7세 피정(皮釘)- 8세 피소(皮燒)- 9세 피정만 (皮正滿)=10세 피홍군(皮洪君)-세 피경송(皮卿松) ● 인구 1985년 인구조사에서 2,413명으로 집계되었고,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 693가구, 2,20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기준 서울 346명, 부산 153명, 대구 426명, 인천 87명, 광주 6명, 대전 29명, 울산 40명, 경기 370명, 강원 32명, 충북 211명, 충남 29명, 전북 8명, 전남 17명, 경북 396명, 경남 49명, 제주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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