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인’과 ‘서인’의 혈투 1- 경신환국
조선 19대 임금 숙종(肅宗) - . 많은 국민들은 그를 ‘희대의 호색한(好色漢)’ 쯤으로나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장희빈(장숙정)이라는 ‘요녀(妖女)’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장희빈은 빼어난 미모와 술수로 궁녀에서 일약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쫓겨나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다. 해서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수차례 극화되었다. 그때마다 함께 등장하여 장희빈의 교태에
넋을 놓고 침을 갤갤 흘리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였던 것이, 그간 우리가 보아온 숙종의
캐릭터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숙종이 여자들의 치마폭에나 휩싸여 국정을 팽개쳐버린
나약한 임금쯤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나약하지 않았으며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국정을 내팽개쳐버린 적도
없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통해 왕권(王權)을 되살리고 신권(臣權)을 쥐락펴락
하였던 막강한 권력의 군주였으며, ‘가장 정치적인’ 임금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게임의 도구’였다고나 할까.
1674년, 35살의 나이로 사망한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숙종의 나이는
불과 14살이었다. 100여년 만에 ‘적장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제왕학을
단계적으로 학습한 후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는 늘
‘나는 날 때부터 군왕으로 태어났다’고 자부해왔으며,
즉위 4개월 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 송시열을 조정에 들였다 내 쳤다를 반복하였고,
임금은 아랑곳없이 학문과 스승만을 중시하는 신하들의 폐단을 막고자 서인에서 남인으로,
다시 소론에서 노론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換局-판을 엎어버리는 것)’을
수차례 반복한 임금이기도 했다. 이때 보여준 숙종의 카리스마와 행동력은
조선의 역대 왕들과 비교해봤을 때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재위 6년 - 불과 스무 살의 나이 - 에 경신환국이, 15년에 기사환국이,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서인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고,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화(士禍)에서 목숨을 잃은 정승보다 더 많은 숫자가 세상을 등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권은 왕권에 짓눌리게 되었고 신하들은 숙종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 되었다. 자칫 잘못해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되자 서인과 남인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정글의 법칙’으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숙종시절에 일어난
세 번의 환국으로 숱한 정치인이 주검이 되어 나갔고, 그 뒤 조선 당쟁사에서 정치보복이
일상화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개국이후 수백 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권력 패러다임을
일거에 뒤집어 엎어버린 숙종 - 이른바 ‘판 뒤엎기의 귀재’로 일컬어지는 숙종의 재위기간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 경신환국(庚申換局)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신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앞에서 언급한 예송논쟁 자체가 신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였다. 국왕과 왕비가 승하하였는데 신하들이 상복문제를 놓고 다툰다는
자체가 강한 신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고, 국왕이 된 천자에게 장남이냐 차남이냐,
혹은 적자냐 서자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약한 왕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은 1675년(숙종 1년) 정월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덕원으로 귀양 보내는 등 서인을 모조리 축출해버리고 허목과 윤휴 등 남인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결집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에 대한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은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 내부에서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대두되어 강경론자인
우의정 허목은 ‘청남(淸南)’으로, 온건파인 영의정 허적은 ‘탁남(濁南)’으로 분파되는 등
여전히 조정이 갈등으로 들끓자 이에 염증을 느낀 숙종은 척신(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이용하여 남인세력을 견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왕위에 오른 뒤
잦은 병환으로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았던 데다 인조반정이 있은 지 60년도 채 안 되는
시기였던지라 언제든지 반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김석주는 본시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2차 예송논쟁 때 남인 측 주장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이 제거되자
다른 서인들이 함께 축출되면서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급기야 서인세력의 발언권마저
완전히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잡고 남인세력을
몰아낼 궁리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경신년인 1680년(숙종 6년) 3월에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서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즈음 이번 연회에서
병조판서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독주로 죽일 것이며, 허적의 서자
허견은 무사를 매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연회에
불참하였고 김만기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일명 ‘유악(油幄)’이라 불리는 이 차일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세도가 높은 양반이라도 일체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왕실에서만 사용하였고,
왕의 윤허 없이는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이 왕의 윤허도 받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빌려가서 썼던 것이다.
숙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허적의 집을 염탐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남인이었고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 있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에 앉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조리 서인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사단이 이쯤에서 일단락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으나,
이런 미묘한 갈등 상황에서 다음 달인 4월 '남인박멸'에 골몰하던 김석주가 사주하고
정원로가 고해바친 '허견(허적의 서자)'의 역모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
(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 ‘福자 돌림’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 즉,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소현세자의 손자)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 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고, 때를 같이 하여 도체찰사부
( 영의정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
소속의 둔군이 그즈음 별다른 이유 없이 특별훈련을 하고 있다는 동향도 숙종에게
즉각 보고되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완벽한 '정치공작'이었으나,
남인을 축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숙종이 이를 묵과할 리 만무였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 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었으며,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이 환국 이후 드디어 저 유명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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