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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서남공동정권,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주도권 쟁탈전
    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2019. 4. 16. 16:06


      
      ■ 서남공동정권,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주도권 쟁탈전 
      
      인조가 즉위한 이후 서인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비록 쿠데타(반정)에 의한 정권찬탈이었다곤 하지만, 자신들이 손수 임금을 만들어냈으니 
      기실 거칠 것이 무어 있었겠는가. 한데 일이 이상한 방향에서 꼬이고 말았다. 
      본시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이었던지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이어왔던 
      중립외교정책을 집권 직후 ‘친명배금’정책으로 바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후금으로부터 2차례(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걸쳐 
      모진 공격을 받았고, 병자년의 2번째 공격 땐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일 효종)까지 볼모로 바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과의 싸움에서는 40여 년간 항쟁을 하였고, 왜군의 공격에 대하여는 
      7년간의 항쟁 끝에 격퇴한 데 반해 병자호란은 불과 2달 만에 
      조선이 항복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주전론’을 주창하였던 서인 정권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을 하자고 박박 우겨댔던 건 서인이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식으로든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해서 서인 정권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번엔 ‘북벌론’을 주창하게 되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 또한 
      심양에서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악연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터이라 
      김상헌․송시열 등을 중용하여 불벌계획을 수립하고 군정에 힘썼으나 
      그 사이 후금이 더욱 강성해진데다 효종마저 급작스레 사망하여 
      북벌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듯 서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자, 그 동안 은인자중 하며 기회만 살피고 있던 
      남인은 쾌재를 불렀다. 그리곤 허목을 간판공격수로 내세우고 서인에게 전격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역사는 이를 ‘예송논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죽은 뒤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자의대비)가 상복(喪服)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2차에 걸친 논쟁을 말한다. 
      오늘의 시각에서야 그깟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가 뭐 그리 대수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엔 그게 그렇지 않았다. 요컨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정권교체’라는 결과까지 낳은 어마어마한 싸움이 예송논쟁이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중시하여 정치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유교의 덕목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던 때였다. 이에 관혼상재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의식에 
      있어서 예학 -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 등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
      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는데, 이 규정을 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예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라 할 것인 바, 
      그 전말을 살펴보면 이렇다.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당시 효종보다 5살 아래였다)의 
      복상은 서인의 뜻에 따라 1년(朞年)으로 정하고 곧이어 현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 3월 남인의 허목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 설을 주장하면서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송시열 등은. 효종이 인조 때 제2왕자였으므로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은 
      1년 설이 맞다고 대항하였고, 남인의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장남이나 다름없으니 3년 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1년 설이 그대로 채택되었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남인의 논쟁을 주도하였던 허목은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송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1674년 효종의 아내요,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또다시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도 조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서인은 효종이 차남임을 강조하며 
      9개월(大功說) 상복을 결정하였다. 이에 남인은 효종 사망 때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1년으로 정해놓았음에도 이제 와서 이를 9개월로 
      고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이번에는 남인 측의 1년 설을 받아들여 
      조대비로 하여금 1년 복상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남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그 임금 
      숙종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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