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평은 동승과 조조 암살을 모의하지 않았다
길평은 한말의 낙양 사람이다. 본명은 태, 자는 평으로 사람들은 그를 길평이라 불렀는데,
한나라 헌제 때 태의(궁중의사)였다.
[삼국지연의]에서 길평은 건안 5년(200)에 차기장군인 동승과 함께 조조 암살을 모의하고,
마침 병을 진찰하는 기회가 생겨 조조를 독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승의 하인이 밀고해 길평은 체포되어 한 시간 동안이나 두들겨 맞고,
전신의 피부가 찢겨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로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길평은 끝까지 자백하지 않는다.
조조는 길평을 동승의 집에 끌고 가 서로를 대면시켜서 증거를 잡으려고 하지만
길평은 그 자리에서 조조에게 욕을 퍼붓고는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 버린다.
그러면 궁중의사인 길평은 정말로 조조에게 고문당해 죽음으로 내몰렸을까?
정사에 비추어보면 [삼국지연의]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를 보면 길평은 길본이라고 해야 하며, 길평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길본은 동승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한 적은 없고,
건안 23년(218) 탐기, 위황 등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길본은 탐기, 위황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승상장사 왕필과 영천전농중랑 장 엄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조가 길본을 죽인 것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건안 5년이 아닌 건안 23년의 일이 된다.
그 외에[삼국지연의] 제69회에는 길평의 아들인 길막과 길목이
탐기와 위황의 계획에 참여 했고,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역사에 기록이 없으므로
나관중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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