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적의 난(萬積-亂)
■ 만적의 난(萬積-亂)1198년(신종 1년)은 고려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이다.
◈ 만적(萬積, ? ~1198년)은 고려 신종 때의 사람으로 당시 집권자이던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비였다. 정중부의 난 이후 몇 십 년 동안 무신 정권에서는
쿠데타로 그 집권자를 몰아 내고 집권하는 등의 하극상 풍조가 만연했고,
그 중 이의민은 경주 노비 출신으로 최고집권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풍토에서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면서 천민들을 모아 봉기하려고 하였으나
봉기 모의에 참여했던 노비 순정의 밀고로 만적의 주도로 봉기에 참여했던
5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체포, 사형되어 일단락 되었다.
만적의 봉기시도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개요와 배경
무신정변은 문무의 지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신분 질서에 많은 변동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하층 계급은 집권 세력이 약화된 것을 이용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현저히
진출하였다. 특히 명종·신종 시대에는 각지에서 농민과 노비가 자주 난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이었다
◈ 전개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로서 여섯 명의 노예와 함께 개경의 북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정중부의 난 이후 천예(賤?) 출신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음을 지적하고,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본래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도 언제까지나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라고 연설하였다.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 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
이 선동적인 연설은 노비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만적은 계획적인 반란을 꾀하여
궐기 방법을정하고, 반란이 성공한 후에는 자기들이 집권하기로 결정하였다.
◈ 결과
만적의 연설을 듣고 있던 한충유(韓忠愈)의 노비 순정(順貞)은
망설이다 이 사실을 주인에게 밀고하였고
그리하여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만적을 비롯하여 난에 가담하려 했던 공사노비 백여 명은
붙잡혀서 포대 자루에 넣어진채 묶여 강물에 던져졌다.
◈ 평가
만적의 난은 실패했으나 한국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노비 해방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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