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대 경종
■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났는데도 진하는 켜녕 왕자의 외할머니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숙종은 비상한 조치를 취해놓지 않으면 태어난 왕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숙종은 일단 결심이 서면 과감하게 실천하는 임금이었다.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1월 초 갑자기 시,원임대신과 6조 및
3사의 장관을 불렀다. 정오까지 오지 않는 신하가 있으면 담당 승지를 엄벌에 처하겠다는
단서까지 단 명령이었다. 대신들이 모이자 숙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국본(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민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생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데 있다. 만약 이에 머뭇거리거나 관망하거나 감히 이의를
제기하려는 자가 있다면 관직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는 곧 장희빈 소생의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조선이 후사는 왕자, 원자,
세자, 국왕의 순서를 밟게 되어 있었으므로 원자로 책봉되면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즉위까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들이 당연히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대하려면 물러가라"는 배수진을 쳤다. 예상대로 서인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판서 남용익의 반대 이유는 "지금 중궁(왕비)의 춘추가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호조판서 유상운, 공조판서 심재도
인현왕후를 거론하며 반대했다. 즉위 14년 만에 낳은 왕자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신하는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숙종의 위기감을 더하게 했다.
"내 나이 서른에 겨우 아들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국세가 위태롭고
옆에는 강한 이웃이 있으니 종사의 중대한 계획을 늦출 수 없다."
숙종의 결심은 확고했으나 반대하는 서인의 당론도 확고했다. 숙종은 재차 반대하는 이조판서
남용익을 중죄로 다스린 후에야 원자 책봉을 강행할 수 있었다. 숙종은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지
닷새 만에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조치였다.
조선시대에 종묘에 고묘하면 사태는 종결된 것이었다.
숙종의 의지가 워낙 강경하자 서인들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향리인 충청도 회덕에 은거해 있었으나, 영의정 김수홍이 사사건건 그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할 정도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당시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가는
대로라는 경칭이 잘 말해준다. 그런 대로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숙종의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송나라 철종은 10세가 되도록 번왕으로 있다가 신종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습니다.
당시 가왕과 기왕의 핍박이 있었는데도 이처럼 천천히 태자로 봉한 것은 제왕은 큰일을 할 때
항상 여유 있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핍박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
송시열은 이처럼 중국 송나라의 예를 들어,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치였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송나라 철종은 신종의 아들이었다. 신종은 28세의 늦은 나이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 소생이었기
때문에 원자가 아닌 번왕으로만 책봉하였다가, 정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했다. 송시열은 이 고사를 빗대 인현왕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라고 주장했다. 당시 인현황후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으므로,
송시열이나 서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후사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송시열의 상소 소식을 들은 서인들은 대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송시열 자신과 서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상소를 계기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일어난 것이다. 서인들이 경신확국으로 정권을 잡은지 9년 만이었다.
이 상소를 본 숙종은 격노했다. 설령 그의 말이 맞더라도 이미 종묘에 고묘한 사안을 재거론하는
것은 왕권을 능멸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상소를 받은 날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승지 이현기와 교리 남치훈, 수찬 이익수 등을 불렀다.
"명나라 황제도 왕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다. 송시열의 주장은 이와 상반되지 않는가?
송시열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그대들에게 물어보려 부른 것이다."
숙종의 말대로 원자 정호 문제는 송시열의 주장과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그렇게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가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다. 현종이 일찍이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할 것이냐"
면서 신하들이 임금이 아닌 송시열에게 충성한다고 꾸짖었던 그 인물이었다. 숙종의 물음을 받은
승지, 교리중에서 오직 남인 승지 이현기만 송시열이 틀렸다고 발언했던 데서 당시 당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숙종은 송시열을 끝까지 옹호하는 서인 수찬 이익수를 파직한 후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시켰다. 그리고 송시열을 구하는 상소는 받지도 말라고 승정원에 명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대한 대처 여부에 원자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믿었다. 서인이 집권한
상황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을 축출하고 반대당인
남인을 등용하는 것만이 원자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숙종은 서인가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결국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쫓겨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서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단행했다. 그간 서인들로부터 받은 정치탄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들의 보복의 칼끝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향했다.
남인들이 계속해서 송시열을 공격하자 숙종은 일단 그를 제주도로 유배보냈다가 위리안치시켰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 있다는 사실자체를 불안해 한 남인들은 그를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든세 살이었던 송시열에게는 국문 자체가 죽음의 길이었다. 숙종이 송시열의 국문을
허락함에 따라 송시열이 뭍으로 올라오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를 맞았다.
서인들에게 그는 죄인이 아니라 정치범이자 확신범이었다. 송시열이 국문받을 경우
벌어질 소동이 두려워진 숙종과 남인은 그를 서울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정읍에서 사사시켰다. 전 영의정 김수항은 이미 사시된 뒤였다.
송시열이 죽은 현장을 수많은 서인 문도들이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 눈물은 남인을 향한 복수의 눈물이었고, 새로 왕비가 된 장옥정과
그녀 소생인 원자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었다.
장옥정 소생의 원자와 서인 사이의 군신관계는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후 남인이 계속 집권했거나 서인과 화해정책을 실시했으면,
희빈 장씨와 원자의 운명은 그다지 비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죽고 죽이는 살육전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적당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남인들은 집권 초반 송시열과 김수항, 이사명, 홍치상 등
무려 1백여 명의 서인들을 사형, 유배, 삭탈관직시키는 정치 보복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숙종 20년 상황은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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