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대 현종
■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현종은 침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대신들을 불러 복제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것은 도신징이 상소한
1주일 후였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홍에게 물었다.
"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복에서 갑자기 9개월복으로 바꾼 것은 무슨 곡절 때문인가?"
" 기해년 선대왕 국상때에 이미 1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때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하지만 고례가 아닌 <국제>를 써서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9개월복도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
김수홍이 대답했다.
" 그때 송시열의 의견은 '고례는 마땅히 이렇지만 당시는 <국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김수홍의 대답이 지닌 모순을 놓치지 않았다. 고례의 기년복은 장자가 아니라 중자의 복이었다.
반면 <국제>는 장자와 중자의 구분 없이 기년복으로 되어 있었다. 즉 중자의 복이었던 것이다.
" 기해년에 영상 정태화가 '마땅히 <국제>를 써야 한다'고 하여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의논해
1년복으로 결정했었다.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
답변이 궁색해진 김수홍이 겨우 대답했다.
" 고례로 하면 9개월복입니다."
" 기해년에는 <국제>를 쓰고 지금은 고례를 쓰니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 기해년에도 고금의 예법을 참조했고 지금도 그렇게 했습니다."
" 그럴지 않다. 그때는 <국제>를 썼는데 그 뒤 문제가 되어 다툰 것은 고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현종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15년 전 경황 없던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민유중이 김수홍을 지원하는 발언을 했다.
"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참고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민유중의 발언을 무시하고 김수홍에게 다시 물었다.
"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김수홍의 답변은 궁색했다.
" <국제>에 장자부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종의 추궁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가 <국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이는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대비께서 1년복을 입은 것은 <국제>이지 고례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기해년에 <국제>를 인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에서 무엇을 인용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서인들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국제>에 따르면 장자부의 복은 기년복이라고 말해놓고,
지금의 대공복이 <국제>라고 말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민유중이 나서서 김수홍을 구원하고자 했다.
" <국제>가 우연히 그러했습니다. 기해년에 대신들이 의논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 시행한 것은 고례였을 뿐입니다."
막중한 국사가 '우연히'결정되었다는 민유중의 대답은 자기 모순이었다. 이들은 1차 예송 때 내부적으로는
고례의 '체이부정'에 따라 1년복을 주장했으나, 그 파장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국제>에 따른다면서
1년복으로 정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제 이 모순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연륜을 쌓은 국왕이었다.
"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좇은 것이다."
김수홍도 모순된 의견에 가세했다.
"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
김수홍이 1차 예송논쟁 때 고례를 썼다고 주장하자 현종은 그 주장을 역습의 재료로 사용했다.
"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
영의정 김수홍은 헤어나기 어려운 늪에 빠졌음을 알았으나 국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참최 3년복입니다."
서인 영의정 자신의 입으로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실토한 셈이다. 이는 곧 1차 예송 당시
서인들이 겉으로는 <국제>의 장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해 효종을 장자 대접한 듯해놓고, 속으로는
고례의 중자복인 기년복을 적용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서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스스로 모순을 자백한 후에야 김수홍에게 내보였다.
김수홍은 집권당을 궁지에 빠뜨린 한 시골 유생의 상소를 상기된 모습으로 받아 읽었다.
김수홍이 다 읽고 나자 현종이 물었다.
" 기해년에 과연 차자로 의논해 정했는가?"
이때 비로소 좌부승지 김석주가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송시열을 직접 겨냥했다.
" 송시열의 수의에 '효종대왕은 이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허목이 논쟁한 것입니다."
현종은 예조판서 조형을 꾸짖었다.
" 예조는 기해년의 일을 자세히 상고한 다음 증거를 대고 고쳤어야 하는데 함부로 대공복으로 고쳤다.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조형이 대답했다.
" 바빠서일 뿐만 아니라 며느리의 상에는 대공복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고쳐서 들인 것입니다.
기해년에 왜 1년복으로 정했는지는 망각하고 상고하지 못했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 기해년의 일을 자세히 상고한 다음에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현종은 서인들이 배후의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공동대처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해
시간을 재촉했다.
" 사채가 중대하므로 예조만 단독으로 의논해서는 않된다. 육경이 반드시
오늘 안으로 모여 의논해야 할 것이다."
민유중이 너무 급한 것 같다며 시간의 촉박함을 말했으나, 현종은 " 지연되면 안 되니 빨리 하라"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의정 김수홍, 판중추 김수항, 이조판서 홍처량, 병조판서 김만기,
호조판서 민유중 등이 긴급히 모여 의논한 후 그날 밤 현종을 찾았다. 선왕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의
문제였으니 그만큼 민감하고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대신들이 전후 순서를 <실록>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정희왕후(세조의 비)는
덕종과 예종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었고 문정왕후(중종의 비)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국제>에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되어 있으며 기해년에 처음 복제를 의논할 때도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후 3년복이란 반론이 나오면서 논의가 분분해졌으나 여러 번 회의한 끝에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장자와 중자를 구별해 장자에게는 최참복(3년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복을 입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입니다. 기해년에 처음부터 <국제>를 쓰기로 했는데 후에 고례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역시 <국제>대로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계사의 설명은 길었지만 정작 현종이 알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현종이 알고 싶은 것은 자의대비의 이번 복제가 기년복인가 대공복인가였다. 물론 듣고 싶은
대답은 "장자부의 복인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
서인들도 현종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15년 전 기년복으로 정한 원죄 때문에 이번에
기년복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면, 15년 전의 기년복은 잘못된 것이 되고
3년복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서인 중신들이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현종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한가지로
분명히 정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김수홍등 서인 대신들의 답변은 궁색했다.
" 신들은 다만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 어떤 전거를 썼는지 알아보라는 분부만 받았으므로
지금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해서는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가장 중요한 지금의 복제를 빼놓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 대왕대비께서 대공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여 의논하라고 하교한 것이다. 기해년 복제에
관한 것만 물을 것 같으면 예방승지에게 시켜 기록을 찾으면 될 것을 왜 대신들에게 의논했겠는가."
현종은 소신을 정리했으므로 뚜렷한 논리가 서 있었다. 반면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서인들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처음 하교받을 때, 그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다만 기해년 복제만 상고해 아뢰었던 것인데
거듭 하교를 받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 내가 처음 하교 했을 때는 내 뜻을 명확히 몰랐다 할지라도 지금은 알았 터인데, 아직도 명백히
아뢰지 않는 뜻을 모르겠다. <국제>대로 한다면 대왕대비께서는 무슨 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인가?"
" 지금 하교를 받았으나 너무 중한 예라 감히 입으로 아뢸 수 없으므로 글로 써서 아뢰겠습니다."
김수홍은 일단 자리를 모면해 서인들과 논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현종이 자의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이 아닌 1년복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의 당론은
대공복이었고, 당시는 임금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했던 당재의 시대였다. 현종은 김석주를 불렀다.
" 내 의견으로는 기해년에 <국제>를 사용했으니 이번 회의 때는 이러이러하므로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하든지, 아니면 저러저러하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논의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재차 올린 계사를 보면 몇 마디 말로 그럭저럭 책임을 때우고 말았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대공복을
입어야 될 듯하다는 말을 또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매우 이상스럽다. 예조에서 한 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죄 주기를 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비호하려고 하니, 빈청이 하는 짓도 놀랍다."
현종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서인들은 현종의 분노가 두려웠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물러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 김수홍과 민유중 등 서인 대신들은 빈청에 모여 현종에게 말했다.
" <국제>를 상고해보니 아들 밑에는 다만 '1년'이라고 썼을뿐,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래 장자부에는 '1년'이라 쓰고 중자부에는 '9개월'이라고 썼을 뿐이며
승중여부는 적지 않았으니 대왕대비의 복제는 9개월로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중한 예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으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예전의 경우를 고증하게 하십시오."
서인들은 여전히 대공복이란 당론을 변경하지 않았다.
" <국제>에 장자부와 중자부의 구분은 있으나 '중자부 9개월복'이란 말 이외에
따로 승중했으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말은 없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왕대비의 복제가 9개월복이란 것이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결국 서인들은 "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다"는 현종의 바람을 무시했다.
이는 현종과 맞서보자는 말에 다름 아니었으니 현종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 기해년 복제 때는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감히
중자부이기 때문에 9개월복이 마땅하다고 하는 구나. <국제>에 '승중'에 대한 조목이 없는 것은
제도의 미비함인데 <예경>을 참조해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빌미로 9개월복을 주장한다면
이런 회의는 무엇 하러 하겠는가? 다시 살펴 아뢰도록 하라."
현종은 분노했고 서인들은 기로에 섰다. 현종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기년복으로 수정하든지, 아니면
기해년에 송시열이 제기했던 '체이부정'을 거론해 정면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인들은 결국 현종과 정면 대결하기로 결정했다. 서인 대신들은 15년 전 송시열이 거론했다가
정태화의 만류로 우회했던 문제의 사종지설을 거론했다.
" 신들은 <국제>만 참고하고 고례는 참고하지 않았지만 이제 고례를 참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사종지설이 나오는데 그 세 번째가 '체이부정'으로서 서자를 세워 가계를 잇게 한
경우입니다. 여기에 '서'자를 쓴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자는 첩의
아들이요,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은 중자인데 여기에서 둘을 함께 서자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또 며느리에 관한 조항을 보면 '무릇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할 수
없는 것이니 전중한 자는 적통이 아니어서 복제를 모두 서자,서부와 같이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조목을 상고해본다면 지금 대왕대비께서 9개월복을 입는 것이 고례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사오나 그 정밀한 뜻은 신들의 짧은 견식으로는 감히 정할 바가 아닙니다.
" 부모가 아들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적통을 전중할수 없다."는 말은, 적통 계승의 권한이 종법에
있는 것이지 부모나 시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는 결국 인조가 효종을 선택해 적통을
물려준 것은 천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효종이나 인선왕후는 장자,장부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자의대비의 복제는 대공이 맞는다는 말이다. 고례로 따져봐도 효종과 인선왕후는 적통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이 말은 곧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계사에 현종이 격분한 것은 당연했다.
"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매우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효종)의 은혜를 입었거늘,
지금에 와서 감히 '체이부정'이란 말로써 오늘의 예법을 결정짓는다는 말인가. <의례>에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가 낳은 차자를 세워 장자라 한다.'고 했다. 경들은 이 조항은 무시하고 다른 조항을 꺼내어
이치에 맞지 않는 어그러진 말로써 예법을 정해 선왕을 '체이부정'이라고 지목하는구나.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
"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힐난에는,
충성을 바쳐야 할 임금에게는 박하면서 대신인 송시열에게 후한
불충분한 신하들이라는 꾸짖음이 함축되어 있었다.
현종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 내 이를 심히 못마땅히 여긴다. 막중한 예법을 자기 당의 영수(송시열)에게
붙은 의논으로 정할 수 없으니 이번 복제는 처음 결정한 대로
<국제>에 있는 기년복으로 정하라."
신중하고 온화한 성격의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인 단안이었다.
현종은 조선의 임금 중 드물게 명성왕후 김씨 외에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았고,
재위 기간 동안에도 대신들과 싸우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그만큼 힘겨운 싸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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