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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제18대 현종 <3>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3. 3. 10:29


    
    ■ 제18대 현종 
    
    ■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정태화와 송시열의 합의는 집권당인 서인의 당론으로 확정되었고 당시 만 열여덟에  지나지 않았던 
    현종으로서는 다른 의견을 낼  만한 확고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1년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던 윤휴는 1년복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의례주소>의 "내종은 외종과 
    같다"는 소를 인용해 송시열의 1년설을 반박했다.
    " 내종은 다 참최복(3년복)을 입으니 대비의 복은 마땅히 3년복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송시열도 물러설 수 없었다. 
    " 내종의 부녀는 모두 신하다. 따라서 임금에게 감히 촌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모두 3년복을 입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왕대비는 선대왕(효종)께서 신하로서 섬기던 분이다. 어찌 신하인 내종의 
    다른 부녀들처럼 참최복을 입는단 말인가? 당연히 1년복을 입어야 한다."
    윤휴도 물러서지 않았다.
    " 주나라 무왕은 어머니이자 문왕의 비인 문모를 신하로 삼았다."
    주 무왕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은 예가 있다는 말이었다. 윤휴가 무왕의 예를 들자 송시열은 주자의 
    말은 인용했다.
    " 주자께서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고 말했다."
    윤휴 또한 지지 않았다.
    "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국왕의 예는 일반 사대부가와  다르므로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란  주장이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현종은 우선 <경국대전>에  의거해 1년복으로 결정했고, 현종이 서인의 
    1년설을 지지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현종과 서인의 속마음은 서로 달랐다. 현종은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효종이 적통과 종통을 모두 이었다는 전제하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 적통에 
    따라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자위했던 것이니, 내심으로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기 때문에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현종과 달리 
    서인은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했으나 실제로는 차자의 복인 고례를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1년복을 놓고 이렇듯 서로 다른 생각을 한  것이 15년 후 2차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 예론을 금하노라
    
    자의대비의 복제가 1년복으로 결정될 무렵 남인 논객 허목이 또다시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파란이 재연된다. 게다가 윤휴와 허목에 이어 3년설에 가세한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계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 차장자가 왕위를 이었다 해서 어찌 별도로 적통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명과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를 계승했는데도 적통이 다른 사람(소현세자)에게 
    있다면, 이는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섭정황제란 말입니까? 또 왕위에 오른 차장자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석견)에게는 임금 노릇을 못하며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왕위에 오른 차장자에게 
    신하 노릇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윤선도의 논리대로라면 송시열의 1년설은 효종의 종통과 정통성을 부인한 역적의  의논이었다.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즉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3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인들이 효종이 아니라 석견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주장이었으니 서인들이 역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 송시열이 종통은 종묘사직을 계승한 임금(효종)에게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
    (소현세자)에게 돌리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종통과 적통이 갈라져서 둘이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열)에 게 있습니다."
    윤선도의 이 과격한 주장에 송시열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서인 전체가 크게 놀랐다. 이는 송시열을 
    역적으로 처단하라는 상소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와 같은 당으로 1년설을 주장한 유신들 모두를 
    역적으로 모는 것이었다.
    이 상소로 서인들은 남인들의 거듭된 문제제기가  단순한 예론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 공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밀리면 정원을 잃을 판이었다. 서인들은 
    당력을 집중해 윤선도를 공격했다.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서인의 집요한 공세에 결국 윤선도는 머나먼 
    삼수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것으로 파문은 일단락되었으나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년 후  심한 가뭄이 들자 현종이 내외에 널리 구언했는데, 이때 전 판중추부사 조경이 응지상소를 올려 
    이를 재론하고 나섰다. 그는 " 윤선도의 죄라는 것은 적통,종통 논의에 있어 효종대왕을 드둔한 것뿐" 
    이라며 윤선도를 옹호하고 나섰다. 복제 문제가 또다시 시끄러워지자 현종은 비로소 단안을 내렸다.
    "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반포하라."
    현종은 예론 자체를 재론할 수 없는 금법으로 만들었다.  현종으로서는 효종의 종통 문제가 재론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다. 효종이 적통이 아니면  현종도 적통이 될 수 없었다. 현종은 예론 자체를 
    금법으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현종이 금지했다고 해서 
    금법이 될 수가 없었다. 다만  현종의 명에 따라 땅속에 묻혀졌을 뿐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채 잠복해 
    있었으며, 누구든지 불씨만 붙이면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의대비보다 여섯 살 많은 현종의 모후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자연적으로 보더라도 며느리 인선왕후보다 
    자의대비가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이 경우 1차 예송논쟁 때와 
    똑같은 상황, 즉 효종비인 장자부냐 아니면 차자부냐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1차 예송논쟁 15년 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1674년(현종 15)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장씨는,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시어머니 자의대비 조씨를 모시다가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를 떠난 
    것이다.그때 쉰한 살의 자의대비 조씨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예송논쟁이 재연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예송논쟁이 아들 효종이 승하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면,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착용 기간에 
    관한 논란이었다. 이는 15년전에 벌어졌던 1차 예송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즉 효종을 
    장자로 보면 인선왕후도  장자부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 즉 중자로 보면 
    중자부이므로 9개월복을 입어야 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1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현종도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는데, 예조에서  다시 당초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자인하고 나섬으로써 
    2차 예송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예조판서 조형과 참판 김익경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의정한 다음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신 등이 어제 상복에 관한 절목 중에서  대왕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올렸으나 <가례복도>와 명나라 
    제도를 보니 큰며느리의 상복은 기년(1년)이고,  그 외 며느리의 복은 대공(9개월)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께서 이미 중자의 상복인 기년복을 입으셨으니 지금의 복제는 9개월이 맞는데 
    경황이 없어 경솔하게 1년으로 아뢰었으니 황공합니다."
    예조는 9개월복으로 절목을 고쳐 바쳤다. 현종이 대답했다.
    " 알았다. 성복때에도 이런 잘못이 있을지 염려되니  담당자인 예조정랑을 잡아다가 죄를 정하라."
    고증을 잘못한 탓으로 돌려진 이 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이를 
    단순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인들에게 이는 효종의 장례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들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제가 장자부의  1년복이 아닌 
    차자부의 9개월복이 된 데 분개했다. 그러나 현종 2년의 금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자의대비는 9개월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한 유생이 이 금법을 깨고 9개월복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나섬으로써 예론이 재연되었다. 
    인선왕후 사후 5개월 만인 그 해 7월, 대구의 유생 도신징은 상소를 올려 서인들의 9개월복을 통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대왕대비의 복제를 기년(1년)으로 정했다가 다시 대공(9개월)으로 고친 것은 무슨  전례에 의한 것입니까? 
    효종대왕 국상때 자의대비께서  입으신 1년복은 <국제(경국대전)>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국제>에도 없는 대공이란 복제가 갑자기 나왔습니다. 15년전에는 효종대왕을 장자로 여겨 1년복을 
    입었다면서 지금은 인선왕대비를 차자부로  여겨 대공복을 입으니 어찌 그 전후가 다릅니까."
    효종 상사 때 '체이부정'의 위험성 때문에 장자나 중자 모두 1년복으로 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1년복으로 정한 편법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그때는 효종을 장자로 대우해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해 9개월복을 입느냐는 반론이었다. 현종의 금법을 
    깨면서 집권당인 서인의  이론에 정면 도전한 이 상소는 일개 유생인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만약 15년  전에 1년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과 9개월복을 의정한 서인의 이론이 같았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신징의 주장은 서인의 이론적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였고 현종도 이 점을 
    의문스러워 했으므로, 금법은 자연히 사문화되고 논란이 재연되었다. 현종도 이제 서른네 살의 장년이었고 
    그 동안 예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스스로의 의견을 갖게  되었다. 현종의 생각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9개월복으로 고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는 효종비를 차자부로 여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나아가 15년  전에도 서인들이 부왕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현종은 좌부승지 김석주를 불렀다. 김석주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의 조카로 현종과는 외사촌인 외척이었으며, 
    또한 효종 때 대동법 실시를 놓고 송시열, 송준길과 치열하게 다툰 김육의 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육을 장사지낼 때 왕가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수도를 썼다고, 송시열이 김석주의 부친 김좌명과 
    김우명을 공격한  일이 있어 두 집안은 구원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남인과 가깝게 지냈다.
    현종은 김석주에게 1차 예송 당시의 각  의논에 대해 물었는데 김석주는 허목의  상소와 
    윤휴가 3년설의 근거로 삼은 <의례주조>의 <참최장>등을  정리해 보고했다. 
    이는 모두 남인들의 주장이었으므로 사실상 1차 예송 때 남인들이 주장한 3년설이 
    맞다고 보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왕 효종을 장자로 규정한 남인들의 주장이 현종의 마음에 든 것은 당연했다.
    현종은 서인들이 부왕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현종으로서는 서인들의 내심대로 효종을 중자 자리에 두면 그 자신의 정통성도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만약의 경우 이들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추대해 쿠데타를 
    감행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를 방치해둘 수 없었다. 현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의대비의 복제를 바꿔놓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집권당인 서인과 한판 승부가 불가피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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