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윤복의 ‘밤길 안내 : 야금모행(夜禁冒行)’. 별감이 관리하는 기생을 동침을 원하는 양반에게 딸려보내는 장면. 별감과 기생의 ‘특수관계’를 엿보게 하는 그림이다.
■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21세기 한국의 유흥문화를 선도한 부류가 오렌지족이라면, 조선시대의 오렌지족은
별감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기생들을 지배하며 조선의 뒷마당 문화를 주도했던 별감들.
그들의 화려한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노동이 없으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노동하기보다 놀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노동은 신성한 것이지만, 인간은 그 신성한 일만으로 일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다.
노동만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비인간적일 것인가?
아니,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노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의 반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노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노는 인간과 노는 문화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퍽 궁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책에서도 인간 삶의 반을 이루는, 역사의 절반이 될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의 이 글은 우리나라 역사의 절반(?)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다.
■ 놀이문화 소개하는 노래
‘한양가’란 가사가 있다. 1848년경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이 가사는 국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9세기 중반 서울 시정의 활기찬 동태를 정확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한양가’는 당시 신분과 사회적 처지에 따른 한양의 각계각층이 즐기던 온갖 놀이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바,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자료다.
화려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소냐
장안소년 유협객과 공자왕손 제상자제
부상대고 전시정과 다방골 제갈동지
별감 무감 포도군관 정원사령 나장이라
남북촌 한량들이 각색 놀음 장할시고
공물방 선유놀음 포교의 세찬놀음
각사 서리 수유놀음 각집 겸종 화류놀음
장안의 편사놀음 장안의 호걸놀음
재상의 분부놀음 백성의 중포놀음
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철다
공자 왕손으로부터 돈 많은 시전상인을 거쳐 의금부 나장까지 온갖 계층이 모두 유흥을 벌인다.
놀이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나는 이 놀이의 내용을 알기 위해 10년 이상 무척 애썼지만,
아직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놀이를 소개한 뒤에 각별히 관심을 끄는 별감(別監)의 ‘승전(承傳)놀음’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다른 놀음은 모두 이름만 소개되어 있으나, 승전놀음은 ‘한양가’ 전체 서술량의
약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구체적인 놀이 과정을 길게 묘사하고 있다. 별감들이 기생과
가객(歌客), 금객(琴客)을 불러 기악(器樂)과 노래, 춤으로 벌이는 거창한 놀이판인 승전놀음이
조선후기 서울의 놀음판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승전놀음의 주최자인 별감이다. 별감에 대해서는 ‘검계(劍契)와 왈자'를 다루면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대전별감은 왈자의 하나로 조선후기 유흥계의 주역이었다.
나는 그 동안 이런 글 저런 글에서 별감의 존재에 대해 주목해왔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것이란 말이 있듯, 조선의 사회적 승자는 양반계급이었기에 역사 서술의
주 대상도 늘 양반이었다. 민중사관은 양반의 대타적 존재인 민중을 역사서술의 주 대상으로 삼지만,
이도저도 아닌 중간부류들은 늘 잊혀지게 마련이다. 별감 같은 부류가 그 짝이다.
나는 이 글에서 별감을 서술 대상으로 불러내고자 한다.
■ 양반 못지않은 위세
사전을 찾아보면 별감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여럿이다. 유향소(留鄕所)의 좌수(座首)
다음 가는 자리를 별감이라 부르고, 또 하인들끼리 서로를 별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 용례와는 다른 궁중의 액정서(掖庭署) 소속의 별감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딱딱하지만, 먼저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들추어보자.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잡직(雜職)조’에 액정서란 관청이 있다. 액정서의 임무는 이렇다.
‘왕명의 전달과 알현(謁見, 傳謁) 및 왕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공급, 궐문 자물쇠와 열쇠의 관리,
궁궐 내정(內庭)의 설비 등의 임무를 맡는다.’
첫째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임금을 알현하는 일을 중간에서 대신 전하는 일, 그리고 임금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를 간수하고 대령하는 일로 주로 임금과 관계된 일이다. 그 다음이
대궐의 관리에 관계된 일이다. 즉 대궐 안에 있는 온갖 문의 열쇠, 자물쇠를 관리하고,
궁궐 마당에 무언가 설치하는 일을 도맡는다. 이런 일들은 문필(文筆)에 관계되는 양반들의
관직과는 달리 몸을 부려서 하는 육체노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일이기에
이들의 위세는 어지간한 양반 못지않다. 때문에 이들 역시 위세를 떨 수 있었던 것이다.
별감은 액정서에 소속된다. 위의 ‘경국대전’에서 ‘왕명을 전달한다’ 해서 꼭 왕에게만 소속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별감은 왕비와 동궁에게도 소속돼 있다. ‘경국대전’의
‘형전(刑典)’ ‘궐내(闕內) 각차비(各差備)’에 별감의 수가 나와 있는데, 대전(大殿, 王)의 별감은 46명,
왕비전 별감 16명, 세자궁 별감 18명, 문소전(文昭殿) 별감 6명으로 모두 86명이다.
이 중 문소전 별감은 곧 없어졌으니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별감의 수는 문소전 별감을 제외하면
80명이다. 연산군 때 120명이 된 적이 있고 인조 때 150명으로 증가한 적도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일로 생각된다.
별감의 수는 영조대의 ‘속대전’에 와서 약간 바뀌는데, 다른 변화는 없고 세손궁 별감 10명이
추가된다. 이것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죽자, 손자인 정조가 세손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별감은 액정서의 지휘 아래에 있으니, 먼저 액정서의 조직을 간단히 살펴보자.
‘정6품 사알 1명, 사약 1명/종6품 부사약 1명/정7품 사안 2명/종7품 부사안 3명/정8품 사포 2명
종8품 부사포 3명/정9품 사소 6명/종9품 부사소 9명’
복잡한 설명을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정6품과 종6품의 사알, 사약, 부사약은 오로지 대전(왕)
소속이다. 정7품 사안 2명부터는 왕비전과 세자궁 소속이다. 그리고 정7품 사안까지는 완전히
독립된 위계지만, 종7품 부사안부터는 별감들이 돌아가면서 보직을 맡는다.
즉 종7품 봉무랑(奉務郞)이 별감으로서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다.
요컨대 액정서를 채우는 주 세력은 별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는 존재’로 주목받은 별감
흥미로운 것은 관직 이름을 보면 이들이 하는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알(司謁)의 ‘사(司)’는
관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알은 ‘알현’을 관장한다, ‘사약(司쿫)’은 자물쇠를 관장한다,
‘사안(司案)’은 ‘서안(書案)을 관장한다, ‘사포(司圃)’는 채소밭, 혹은 꽃밭을 관장한다,
‘사소(司掃)’는 청소를 관장한다는 뜻이 된다. 이름만 들어도
이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별감은 그들의 직무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정에서의 행각이
별감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별감은 ‘노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앞서 왈자에 대해 언급했을 때 왈자의 한 부류로 별감을 들었다. 별감이 왈자의
한 부류가 된다는 것은 조선후기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시 한번 관련 자료를 보자.
‘관우희(觀優戱)’란 문헌이 있다. 송만재(宋晩載)란 사람의 아들 송지정(宋持鼎)이 1843년 과거에
합격을 하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는 법이고, 또 광대패를 앞세워
각종 놀음판을 벌이게 마련인데, 송만재는 집안이 가난하여 광대패를 부를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광대패의 연희(演戱)를 50수의 시로 읊어 아들의 과거 합격을 축하했던 것이다.
‘관우희’가 바로 그 작품이다.
‘관우희’는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등 당시 광대패가 공연했던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어
국문학과 민속학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글에서 필요한 부분은 판소리 열두마당을 소개한 부분이다.
그 열두마당을 시로 읊고 있는데, 그 중 ‘왈자타령’을 읊은 시에 “遊俠長安號曰者, ?衣草笠羽林兒”란
구절이 있다. “장안의 유협을 왈자라 하나니, 천의(?衣) 입고 초립(草笠)을 쓴 우림아(羽林兒)로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천의와 초립이란 말이 비상하게 중요한데, 이는 다름아닌 별감의 복색을
형용한 것이다. 천의(?衣)의 ‘천(?)’은 꼭두서니를 말하는 바, 꼭두서니는 붉은색의 염료로 쓰인다.
즉 붉은 색 옷이란 뜻이다. 초립은 문자 그대로 초립인데, 붉은색 웃옷과 초립은 별감의 복색이다.
별감은 흰 옷을 입고 외출하지 못한다. 따라서 천의초립이라 하면 바로 별감을 가리킨다.
우림이란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액정서 별감을 지칭한다.
유협이란 말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유협은 다름아닌 협객이다. 협객이란 무엇인가?
연암 박지원은,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俠)’이라 하고, 재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고(顧)’라고 한다. 고일 경우 명사(名士)가 되고, 협일 경우 전(傳)으로 남는다. 협과 고를
겸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힘으로 남을 돕는 것이 협객이며 협은 무력을
바탕으로 삼는 행위다. 사실 의협적 행동과 폭력은 남을 돕느냐, 아니면 남을 착취하느냐의
방향만 다를 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무력적 성격에 주목하여 유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왈자는 폭력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했는데, 별감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의 행동은 실로 윤리도덕과는 상관없이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 임금의 친척 두들겨팬 별감
‘왕조실록’에는 이들 별감에 관한 자료가 적지 않은데, 대개는 술을 먹고 소란을 떨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관계된 것들이다. 다음은 숙종 35년 3월25일 사헌부가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별감 송정희(宋鼎熙) 등 6, 7명의 불량배들이 술과 고기를 차려놓고 창녀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왁자하게 놀고 있어, 사헌부의 금리(禁吏)가 체포하려고 하자
금리를 구타하고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창녀의 집이란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방으로 짐작된다. 이 자료는 별감들이 기방의 주 고객이었음을 증언한다.
아울러 그들이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가진 부류임을 증언한다.
이들의 폭력적 행동의 사례는 종종 보고되는 바다. 영조 43년 7월29일 액예(掖庭署 下隷란 뜻,
곧 별감을 가리킴)가 야음을 타서 의녀(醫女)를 결박한 뒤 치마를 벗기고 추행한 사건이 보고되고
있다. 이것은 별감이 기생 노릇을 하는 의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숙종 38년 10월20일 형조판서 박권(朴權)이 보고한 별감 김세명(金世鳴) 사건은 별감이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별감 김세명은 능소(陵所)에서 적간(摘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종실인 원흥(元興) 수(守) 이후(李煦)는 김세명의 인사를 받고도 답배를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김세명이 욕을 하자, 이후는 김세명의 입에 오물을 집어넣고 난타하였다. 종실이라면 임금의
친척이니 별감과는 지체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종실이 별감의 입에 오물을 집어넣고 난타한 것은
인정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신분사회였으니 또 이해할 수가 없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세명은 동료 20여 명을 이끌고 이후의 집을 찾아가 이후를
끌어내 묶은 뒤 있는 힘을 다해 구타하여 분을 풀었다. 이후의 형 이경(李炅)이 입궐하여 이 사태를
알리려 했더니, 별감 등이 알아차리고 역시 빰을 치고 구타하였다. 별감의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결국 김세명은 절도에 전가사변(全家徙邊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함)되었다.
유사한 사건이 있는데, 순조 16년 6월3일의 것이다. 포교들이 술 취한 무뢰배들을 잡았는데,
그 중 박몽현(朴夢賢)이란 자가 있었다. 궁중의 하인을 지냈다 하기에 석방했는데,
박몽현의 아비가 왕대비전의 별감 한 패를 거느리고 우포도대장 서영보(徐榮輔)의
집으로 들이닥쳐 포교와 포졸을 구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포교의 집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린 일로 처벌되었다.
숙종 43년 2월6일에는 별감이 금령을 범하고 밤에 나다니다가 포도청에 잡히자
같은 별감들이 나졸을 구타하고 갇힌 동료를 구출하는 사건이 있었고,
영조 51년 2월25일에는 액예와 포교가 술집에서 싸우다가
액예가 포교를 결박하였는데, 액예들이 무리를 지어
포교를 구타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별감이 통행금지를 어기고 돌아다니거나(정조 4년 12월25일), 술을 먹고
술주정을 하는 것은 (순조 10년 4월30일) 다반사였고,
술에 만취하여 포교에게 잡히자 포교의 집에 들이닥쳐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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