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음에 이르는 병, 종기
비슷한 시기에 정래교(鄭來僑)가 지은 ‘백광현전(白光炫傳)’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작자 정래교도 흥미로운 사람이다. 양반은 아니고 중인에 속하는 인물인데, 중인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신분의 장벽에 막혀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가 의원의 전(傳)을 지은 것도 자의식의 반영일 것으로 생각된다.
‘백광현전’에 의하면 백광현은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이다. 한의학은 원래
외과 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의학이다. 종기의 치료도 외과적 방법에 의한 치료술이 드물었던 바,
그는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원도 별 볼일이 없는데,
마의라니 지체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마의로서 그는 말의 병을 오로지 침을 써서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정통적인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으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기술이 진보하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술해 보았더니 효험이 있었다. 그는 이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수많은 종기의 증상을 보면서 의술이 더욱 정심해졌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임상경험이 풍부해졌던 것이다.
하필이면 종기인가?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적고 병 취급도 않지만, 해방 전까지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종기에 관한 한 불후의 명약인 ‘이명래고약’이 없었더라면
저승에 갔을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종기의 역사는 장구하다. 2000년 전 사마천은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종기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장군 오기가 졸병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자, 그 소식을 들은
졸병의 어머니가 펑펑 운다. 옆에 있던 사람이 장군이 종기를 빨아서 치료해 주었으니 영광이 아니냐,
왜 우느냐 하니, 어미 말인즉 저 아이의 아버지도 오기 장군이 종기를 빨아주자 감격한 나머지
전쟁터에서 돌아설 줄 모르고 싸우다가 죽었노라고, 그러니 저 아이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종기를 한번 빨아주고 부하의 목숨을 손에 넣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시라. 오늘 누가 당신의 종기를 빨아주는가?
■ 과격한 종기 치료술
종기는 요즘 들어 흔한 병이 아니지만,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큰 병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하다. 조선시대에 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제왕의 권력도 조그만 종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종기가 이토록 큰 병이다 보니, 조선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종기는 참으로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의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그를 신의(神醫)라고 불렀다.
과격한 치료술이다. 침을 써서 절개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칼 같은 것으로
종기의 뿌리까지 절개했을 것이다. 외과적 방법인 것이다. 정래교는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 그는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정래교는 백광현을 백태의(白太醫)라고 부르고 있다. 태의는 곧 어의(御醫)다.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내의원 의관이란 원래 의과 출신들이
차지하는 법이고, 또 의과란 대개 의원을 세습하는 가문 의과중인들이 독점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의
의원이 의술이 탁월할 경우 내의원 의원이 되는 길도 열려 있다. 내의원에 소속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의과를 통과해 내의원 어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본원인(本院人)이라 한다. 둘째는 의약동참(醫藥同參)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는 것이다. 백광현은 아마 후자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과방목(醫科榜目)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숙종 21년 12월9일 숙종은 백광현을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이날 실록은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
라 하고 있다. 아마도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 때문에 내의원에 들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 이름없는 민중 의원들
백광현이 내의원 의원이 된 것은 현종 때다.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16일에 현종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를 하는데, 백광현이 거기에 처음 보인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랐고 마침내는 현감까지 지낸다. 숙종 10년 5월2일에 왕은 그를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의원이 현감이 된 것은 대단한 출세다. 사람이 이쯤 출세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이다. 민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의업을 시작했던 백광현은 귀한 몸이 된 뒤에도 초발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누가 부르면 즉시 달려갔고, 가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 나이가 많고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게으른 적이 없었으니, 기술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던 것이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귀하신 분이 되었다 하여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민중의(民衆醫)로서의 모습이 약여하지 않은가? 무릇 의원이란 이래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종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했다면,
고약으로 유명한 종의도 있다. 피재길(皮載吉)이란 사람이 바로 그인데, 역시 홍양호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년)에 머리에 작은 종기가 났다. 침을 쓰고 약을 썼지만 종기는 점차 얼굴과
턱 등으로 번져나갔다.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기거동작(起居動作)이 편할 리가 없다. 방치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종기다. 내의원에서 별별 방도를 다 썼으나 종기는 번져갔다. 이토록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 피재길의 이름을 아뢴다.
피재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다. 중인의 족보를 모은 ‘성원록(姓源錄)’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에 의원 가문으로서 홍천(洪川) 피씨의 가계가 나온다. 하지만 피재길의 이름은 없다
(다른 載자 항렬의 인물들은 물론 있다). 이건 다분히 그의 가정적 이력과 관련이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지 못했고,
의서는 아예 읽은 적이 없었다.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의원노릇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생전에 보고 들었던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처방이란 것은 딴 게 아니라 고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의술로 오만 가지 종기에 듣는 고약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근본 없는 의원인 탓에
의원이란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약은 잘 들었다. 양반가에서도 이 근본 없는 의원을 불러
고약의 효험을 보곤 했다고 하니, 그는 애초 민중의 세계를 떠돌던 민중 의원이었던 것이다.
■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
정조는 피재길을 불렀다. 길거리의 떠돌이 고약장수가 지엄한 분을 뵙다니, 땀이 쏟아지고 온몸이
벌벌 떨린다. 말문이 막힌다. 정조는 이 약장수를 안심시킨다. “두려워말고 네 의술을 다 발휘해
보도록 하라.” 약장수는 “신에게 한 가지 써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웅담을
주재료로 한 고약을 만들어 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웅담고다. 환자(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하자,
“하루면 통증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답한다. 과연 말과 같아 사흘이 지나자
깨끗이 나았다. 명의가 따로 없다. 묵은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고마운 일이 있으랴?
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을 붙이고 조금 지나 전날의 통증을 씻은 듯 잊었다. 지금 세상에 이런 알려지지 않은 비방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다.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도를 의논해 보라.”
내의원 의원들은 그를 내의원 침의(鍼醫)에 차정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려 줄 것을 아뢰니, 정조는
당연히 허락하였다. 이어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이 되었다.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가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皮載吉)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藥院)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7년 7월 16일)
정조는 그로부터 7년 뒤(정조 24년 6월)에 종기로 죽는다. 피재길 역시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효험이 없었다. 왕이 죽고 나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을 귀양 보내는 전례에 따라
피재길은 무산부(茂山府)로 귀양을 갔다가 순조 3년 2월에 석방되었다.
피재길이 정조의 종기 치료에 쓴 웅담고는 마침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고 하니,
어떤가? 요즘 세상이라면 특허신청부터 하고 값을 턱없이 올려받아 돈벼락을 맞을 궁리부터
하지 않았을까? 다른 의원이 웅담고를 만들어 쓰면 환자야 죽든 말든 고소부터 하지 않았을까?
피재길 이야기를 하니 이명래고약이 생각난다. 이명래의 고약으로 살아난 사람이 그 얼마였던가?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짐작하실 것이다.
■ 저렴한 약값의 비밀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던 민간 의원이 또 있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실린 이동(李同)이란 사람이다. 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나 역시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사람은 정조의 치질을
치료한 적이 있는데, ‘환부’를 부복해 들여다보느라 대머리가 되어 상투를 짤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존의 항문을 정확하게 들여다본 것은 이동이 역사상 최초일 것이다. 이런 수고 덕에
정조의 치질이 완치되었고, 정조는 탕건을 하사하고, 아울러 호조 돈 10만 전을 내렸다. 이동도
아마 민간에서 얻은 명성으로 동참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그가 썼다는 약재다. 그는 침과 뜸을 기본으로 썼지만, 약만은
독특했다. 그의 처방이란 손톱, 머리카락, 오줌, 똥, 때 같은 것이었다. 풀이나 나무, 벌레, 물고기
따위를 처방한 적도 있는데, 도무지 돈을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그의 주장인즉 이렇다.
“제 한 몸에 본디 좋은 약재를 갖추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른 물건을 쓴단 말인가?”
약이 될 것 같지 않은 약재의 사용 이면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민중을 구료한다는 절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이동은 의과에 합격한, 정통 코스를 밟은 의원이 아니었다. 그 역시 백광현이나
피재길처럼 민간의 의원으로 출발하여 왕실에까지 알려진 경우로 짐작된다.
나는 이동의 이상한(?) 약재에서 민간요법에 숨어 있는 오묘한 약리보다는 조선시대의 공식
의료시스템에서 제외되어 있던 민중들의 처절한 삶의 의지를 본다.
■ 전염병의 홀로코스트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정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 8000여 명이었다 (‘정조실록’ 23년 1월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대량의
사망자는 지금 드물게 남아 있는 통계를 보아도 전염병 때문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전염병의 삼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세 전염병의 거두는 번갈아 등장하여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1821년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이다.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859년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의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7일에는 김종수(金鍾秀)가,
18일 채제공(蔡濟恭)과 서호수(徐浩修)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다. 서호수는 소론가로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에 의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었고, 약 7개월 뒤에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는 미생물이 만드는 것인가?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알려진 것은,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발견하고부터다.
미생물과 전염병 사이의 메커니즘이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였으니, 발본적
치료법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전염병이 돌면 정부는 바빴다. 아니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제(?祭)를 지내는 것이었다. 국가의 의료기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서 약제를 공급하는가 하면, 병막을 짓고 병자를 모아 간호했다.
이따금 전염병이 돌았던 곳에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없었다. 전염병이 저절로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전염병의 구제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정조 15년과 16년 사이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을 때
황해도 재령(載寧)의 김경엽(金景燁)이란 사람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는데, 이 사람은 매번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준 것이 거의 1000명에 가까웠기에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정조실록’ 16년 2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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