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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기(狎鷗亭記) / 김수온(金守溫)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9. 2. 15. 18:50
압구정기(狎鷗亭記) / 김수온(金守溫)
숭산(嵩山)1) 화산(華山)에 올라서 광활한 조망(眺望)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삼성(參星) 정성(井星)의 높이를 지나야 하고2), 강하(江河)를 건너서 어조(魚鳥)를 구경하는 자는 반드시 주즙(舟楫)3)의 위험을 밟게 마련이다. 만약 높이 오르지도 않으며 위험을 밟지도 않으면서 시정(市井)과 지척이요. 성읍(城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강산의 승경을 겸비할 수 있는 땅이 있다면, 이는 대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그 사람에게만 물려주려는 것이니, 어찌 쉽게 얻을 수 있으랴?
왕도(王都)에서 남으로 5리쯤 가면 양화진(楊花津)4)의 북쪽과 마포(麻浦)의 서쪽에 언덕 하나가 우뚝 솟아 환히 트이고 강물로 빙 둘린 곳이 있어 세상에서 화도(火島)라 일컫는다. 이전에는 우양(牛羊)의 방목지로 위쪽은 민둥민둥하고 아래는 황폐하여 누구도 그곳을 사랑하는 자가 없었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5) 한공(韓公)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노니는 땅으로 삼았다. 공이 이 정자에 오를 적에 흰 갈매기가 날아서 울고 지나가니 공은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갈매기라는 새는 대개 천지와 강해(江海)로 집을 삼고 예나 지금이나 풍월로 생애를 삼아서 잠기는 듯 떠오르는 듯 서로 친근하여, 조수를 따라 왔다가 조수를 따라 가곤 하니 천지간에 한가한 존재로다. 사람에게는 누가 저 갈매기와 같이 기심(機心)6)을 잊은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중략)…
정자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이 더욱 크고 넓어서 넘실넘실 굽이치며, 바다로 이어지고 해상에 널려 있는 모든 섬들이 멀고 아득한 사이에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사라졌다 하며, 간혹 상선(商船)들이 꼬리를 물고 노를 저으며 오락가락하는 것이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북으로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거듭거듭 솟아나서 새파란 빛을 더위잡을 만큼 울울창창하여 궁궐을 옹위하고 있으며, 무르익은 빛이 뚝뚝 떨어지는 듯, 푸른 빛깔이 젖어오는 듯하며 말이 뛰어 내닫는 듯한 것은 남쪽을 끼고 있는 관악산(冠岳山)이요, 놀란 파도는 우레를 울리고 솟는 물결은 해를 적실 듯 콸콸 쏟아져 바다로 닫는 것은 동에서 오는 한강이다. 무릇 산의 광채와 물의 빛깔이 가까이에서는 구경할 만하고 멀리서는 읍(揖)하는 듯하며, 이의(二儀)7)의 높고 깊음과 삼광(三光)8)의 서로 다투는 듯 밝은 것과 귀신의 음습함과 드러남, 음양(陰陽)·풍우(風雨)의 어둡고 밝음의 변화하는 것이 모두 궤석(几席)9) 아래 노출되지 않은 것이 없다. …(중략)…
옛날 사안(謝安)10)은 동산(東山)에 오를 때면 반드시 기녀들을 불렀으니 이는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할 따름이요, 하지장(賀知章)11)은 경호(鏡湖)를 하사받아서 낭만으로 자처하였으니 이는 세상과 인연을 끊은 청광(淸狂)12)에 그칠 따름이다. 이 모두는 천년 전의 한 이야깃거리는 될지언정 어찌 공과 더불어 같이 따질 수 있으랴?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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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산(嵩山): 중국의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 오악은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嵩山)임.
2) 삼성(參星)~지나야 하고: 이태백의 시에, 촉산[蜀山]의 높은 것을 묘사하면서, “삼성[參星]을 만지고 정성[井星]을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삼과 정은 별 이름이다.
3) 주즙(舟楫): 배와 삿대.
4) 양화진(楊花津): 조선조 때 한강에는 군인이 주둔하는 3진(三鎭)이 있었다. 송파진(松波鎭), 한강진(漢江鎭), 양화진이 그것이다. 양화진은 오늘날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北岸) 당인리 화력발전소 서남쪽의 외국인 묘지가 있는 잠두봉(蠶頭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나루터로서, 양천(陽川)․강화(江華) 방면으로 오가는 나루터 역할과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물자반입과 검색을 하는 목(項)이기도 했다.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다.
5)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 조선 세조 때의 문신 한명회(韓明澮: 1415-1487)를 가리킨다.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ㆍ사우당(四友堂).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추존)의 아버지이다.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비롯한 여러 대신을 차례로 죽이고 단종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 1등이 되었으며, 뒤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주살하도록 하였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6) 기심(機心): 남을 속이거나 책략을 꾸미는 마음.
7) 이의(二儀): 천지(天地).
8) 삼광(三光): 해[日], 달[月], 별[星].
9) 궤석(几席): 안석(案席: 벽에 세워 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돗자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
10) 사안(謝安): 중국 동진의 재상(320-385). 자는 안석(安石). 효무제(孝武帝) 때 전진(前秦)의 부견(堅)이 쳐들어오자 이를 무찔렀다.
11) 하지장(賀知章): 중국 당나라의 시인(659-744). 자는 계진(季眞), 유마(維摩). 호는 사명광객(四明狂客). 태상박사를 거쳐 비서감 등을 지냈고, 시인 이백을 시선으로 불렀던 사람이다.
12) 청광(淸狂): 지나치게 결백하여 다른 사람들이 꺼리고 멀리하는 사람.
♣해설
지금의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조선 초기의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에서 유래한다. ‘친할 압(狎)’과 ‘갈매기 구(鷗)’를 정자 이름으로 삼았으니, ‘압구정’은 ‘벼슬을 버리고 강촌에 묻혀 갈매기와 친한다.’는 그럴 듯한 뜻을 지닌 정자이다.
정자의 주인공 한명회는 본관이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또는 사우당(四友堂)으로,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였으나 문음(門蔭)1)으로 경덕궁(景德宮) 궁궐지기가 되었다. 그러나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계유정난(癸酉靖難)2)을 일으켜 세조를 등극시키는 등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였고, 예종과 성종의 국구(國舅)3)가 되어 세 임금을 모시며 영의정 등 고관요직을 지내면서 73세까지 장수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다.
그는 재물을 몹시 밝혀 탐욕스러웠고, 주색을 즐겼으며,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압구정으로 초대,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는데, 국왕만 쓰게 되어 있는 용봉(龍鳳) 차일(遮日)4)까지 쳐서 호사의 극치를 맛보기도 하였다.
한경지락(漢京識略)5) 등의 책에 따르면 성종을 비롯, 많은 문사들이 ‘압구정’을 기리는 수백 편의 시를 한명회에게 전했다고 한다. 「압구정기」도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닌 글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한 글의 끝 부분을 보면 은근한 풍자도 엿보인다.
최경지(崔敬止)6)라는 선비도, ‘임금이 하루에 세 번씩/ 은근히 불러보아 총애가 흐뭇하나/ 정자가 있으되 와서 노는 주인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機心)만 끊어졌다면/ 비록 벼슬바다 앞이라도/ 갈매기와 친압(親狎)할 수 있었으련만.’이라며 그의 위선과 부귀를 풍자한 시를 남겼다.
지은이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본관이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또는 식우(拭疣)이며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훈(金訓)이다. 1458년(세조 4)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한성부윤,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육경(六經)에 해박해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저서로는 “식우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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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음(門蔭): 공신 또는 고관의 자제를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2) 계유정난(癸酉靖難):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수양 대군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 10월 10일의 정변으로, 김종서ㆍ황보인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은 사사(賜死)되었다.
3)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4) 용봉차일(龍鳳遮日): 국왕만 쓰게 되어 있는 용과 봉황새가 그려지고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
5) ?한경지락(漢京識略)?: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1830년(순조 30)에 지은 서울의 주요 사적을 정리한 책이다.
6) 최경지(崔敬止): 조선 초기의 문신(?-147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보(和甫).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9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있을 때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곧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주병(酒病)으로 죽었다. 기개가 높고 시명이 있었으며, 세조 말~성종 초에 걸쳐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문운 융성에 공헌한 바 있다.그는 성품이 정직하고 기개가 높아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를 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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