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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모란정환혼기 (牡丹亭還魂記)중국의 고전 /소설과 희곡 2019. 2. 7. 17:23
317. 모란정환혼기 (牡丹亭還魂記)
저작자 탕현조(湯顯祖)
1598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꿈속에서 맺은 약속이 이윽고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탕현조의 명작이다. 여주인공 두여랑(杜麗娘)은 모란정에서 잠깐 졸다 꿈속에서 유몽매(柳夢梅)와 맺어졌다가, 일단 죽은 뒤 모란정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 제목은 ‘환혼기’라고도 하며, 55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탕현조(1550~1616)는 자가 의잉(義仍)이고, 호는 약사(若士)이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고, 21세에 향시(鄕試, 과거의 지방 시험)에 급제했다. 그러나 정치가 장거정(張居正)과 사이가 나빠 박해를 받았다. 장거정이 죽은 뒤, 34세에야 비로소 진사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이후 남경에서 태상시박사(太常寺博士)를 역임했는데, 42세 때는 조정에 비판적인 문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반대파에 밀려 광동(廣東)의 서문(徐聞)으로 유배당했다. 그 뒤 사면되어 절강성 수창(遂昌)의 지현(知縣)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백성 사이에서 어느 한 편만을 들 수 없어 괴로워하던 탕현조는 5년 만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희곡으로는 「옥명당사몽(玉茗堂四夢)」(옥명당은 탕현조의 서재 이름)이 가장 유명하다. ‘4몽’은 『자차기(紫釵記)』, 『남가기(南柯記)』, 『환혼기(還魂記)』, 『한단기(邯鄲記)』를 가리키며, 모두 꿈을 소재로 한다. 탕현조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희곡 창작에 전념했다. 문사(文辭)를 중시한 나머지 노래로 부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음률을 맞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 사람들의 목이 뒤틀려 버려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만년은 불우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기력도 다해 만사에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상심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오늘날까지 중국 희곡사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62년에 그의 전 작품이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 꿈속에서 맺어진 유몽매와 두여랑
유춘경(柳春卿)은 유종원[柳宗元, 773~819,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자후(子厚)]의 자손으로 명문 출신이지만, 지금은 과일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한 미녀가 매화꽃 아래 서서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유 선생님, 우리는 인연이 있습니다. 당신은 꼭 출세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유춘경에게 이름을 몽매(夢梅)로 고치라고 했다.
남안(南安)의 태수 두보(杜寶)는 당나라 최고의 시인 두보(杜甫)의 자손이다. 하나뿐인 딸 두여랑에게 신부 수업을 시키기 위해 가정교사 진최량(陳最良)에게 학문을 배우게 했다. 공부에 지친 두여랑은 어느 날 화원으로 살짝 마을을 나갔다. 한창 봄이 무르익어 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두여랑은 문득 춘정에 젖어들어 좋은 배필이 없는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며, 모란정에서 잠깐 졸았다. 그 사이, 꿈속에 한 청년이 나타나 버들가지를 손에 들고 “이걸로 시를 읊어 보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여랑은 내심 기뻤지만 총각 앞에서 입을 벙긋할 수 없었는데, 청년은 부끄러워하는 두여랑을 끌어안더니 태호석(太湖石) 부근으로 데리고 가서 연분을 맺었다.
떠나가는 청년을 애타게 부르는 두여랑을 어머니 견(甄)씨가 깨웠다. 그때부터 두여랑은 그 청년을 그리워하며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솟구치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날이 여위어 가는 자신을 슬퍼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벽걸이 그림으로 그려 시 한 편을 적어 두었다. 그 시는 뒷날 매화나무 아래에서 환생해 장원 급제한 유몽매와 맺어짐을 예견하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두여랑은 숨을 거두었고, 슬픔에 젖은 부모는 딸의 유언에 따라 화원의 매화나무 아래에 묻어 준 뒤, 그 옆에 매화암(梅花庵)을 세워 석도고(石道姑)라는 비구니에게 맡겼다.
두여랑의 혼은 명부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판관은 색정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고 따졌으나 화원의 화신(花神)이 나타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옹호함으로써 결국 환생을 허락받았다.
한편, 유몽매는 과거를 보러 도성으로 향하다가 추운 겨울 날씨에 그만 병에 걸려서 쓰러질 지경에 처했는데, 진최량의 도움으로 매화암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화원을 거닐던 유몽매는 태호석 아래 묻힌 벽걸이 그림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전에 두여랑이 그린 자화상으로, 시녀 춘향(春香)에게 지시해 아무도 모르게 거기에 묻게 했던 것이다. 두여랑의 그림을 본 유몽매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그림 속의 여인을 되뇌어 불렀다. 명부에서 돌아온 두여랑이 그 소리를 듣고 눈길을 들어 보니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람이 거기 있는 게 아닌가. 두여랑은 기뻐하며 이웃집 여자의 몸을 빌려 매일 밤 유몽매를 찾아갔다.
유몽매가 두여랑의 무덤을 파 소생시켜
얼마 후 두여랑은 유몽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임을 알리고 환생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유몽매는 놀라면서도 두여랑을 아내로 삼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심정으로 석도고에게 이야기하고 협력을 구했다. 그리하여 두여랑의 말대로 그녀의 무덤을 파 관을 열자 두여랑이 소생했고, 며칠 몸조리를 하고 나자 원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진최량이 성묘를 온다는 소식을 들은 석도고는 두 사람을 여행을 떠나보냈다. 그 뒤에 성묘를 온 진최량은 무덤이 파헤쳐진 것을 보고는 그것이 유몽매의 소행이라 여기고 서둘러 두보에게 보고하러 갔다.
그때 두보는 회양(淮揚)에서 이전(李全)과 전투를 벌였는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므로 신변의 안전을 위해 부인은 춘향과 함께 도성으로 피난을 간 터였다. 진최량은 도중에 부인이 적에게 사로잡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황망히 두보에게로 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두보는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과 딸 두여랑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말을 듣고 슬픔에 젖었지만, 곧 정신을 추스리고 열심히 계략을 짠 다음 진최량을 사자로 보내 이전 부부와 화평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연회를 열게 되었는데, 유몽매가 찾아왔다. 그는 도성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금나라의 침입으로 발표가 늦어지자 그 짬을 이용해 두여랑의 부탁으로 두보의 근황을 살피러 온 것이다. 그러나 두보는 사위로 자칭하는 유몽매를 사기꾼으로 오인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문에 도성에서는 과거에 장원한 유몽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동이 벌어졌고, 조정에서는 각지로 사자를 보냈다. 그 사자 가운데 하나가 두보에게로 왔을 때, 유몽매는 무덤을 파헤친 죄인으로 곤장을 맞고 있었다. 사자는 유몽매를 알아보고 구하려 했으나 두보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자는 곧 천자에게 연락해 재판을 열었다.
한편, 도성에 남은 두여랑은 우연히 피난 온 어머니와 시녀 춘향을 만났다. 딸의 환생을 안 어머니는 놀라면서도 기뻐했고 덧붙여 사위 유몽매의 장원 소식까지 접했다. 그런데 아버지 두보가 몽매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고 몽둥이찜질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셋이서 천자 앞으로 나아갔다. 두여랑은 아버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아버지는 귀신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슬픔을 참다못한 두여랑이 쓰러지자 두보는 저도 모르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의 마음도 풀어지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모란정에서 시작한 사랑은 이렇게 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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