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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劍契와 왈자-<2>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2. 3. 14:57



          신윤복 / 야금모행-통행금지 시간에 몰래 다니다
    
    ■ 맑은 날엔 나막신, 궂은날엔 가죽신   
    이제 검계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히 해보자. 영조 때 포도대장으로 유명했던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張大將傳)’에 검계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에는 오래 전부터 무뢰배들이 모인 것을 ‘검계’라 하였다. ‘계’란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모인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검계 사람은 옷을 벗어 몸에 칼을 찬 흔적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낮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는데, 안에는 비단옷을 받쳐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삿갓 위에는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 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본다. 
    혹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고 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전부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 양가 부녀자들이 겁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개가 호가(豪家)의 자식들이어서 오랫동안 제압할 수가 없었다. 장대장이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검계 사람을 완전히 잡아 없애고 발뒤꿈치를 뽑아 조리를 돌렸다.”
    (이규상, 張大將傳 중 ‘一夢集’) 
    유난스럽지 않은가. 낮에는 자고 밤에 돌아다니고,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으며,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니, 
    일상적 행위를 철저히 뒤집는 것이다. 일견 저항의식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희한한 존재인 것이다.   
    
    ■ 검계 킬러 장붕익 
    
    위의 인용문은 18세기의 문인인 이규상이 쓴 ‘장대장전’의 일부다. 장붕익은 앞서 
    ‘화해휘편’의 영조 때 포도대장으로 검계를 소탕했다는 바로 그 인물이다. 
    장붕익은 1725~35년 사이에 포도대장을 지냈다. 포도청에 관한 자료로는 ‘포도청등록’이 있지만, 
    남아 있는 문헌들은 대개 19세기 것이고, 18세기 초반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자료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영조대의 유일한 검계 자료일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검계는 
    약 50년 뒤까지 그대로 존속했다. 이것은 아마도 검계 자체가 비밀 조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계는 매우 비밀스런 조직인데, ‘장대장전’의 작자 이규상은 검계의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이규상은 물론 양반이며,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인 한산 이씨다. 이규상은 이 이야기의 소스를 
    밝히고 있다. 즉 검계의 구성원이었던 표철주(表鐵柱)가 그 정보원이다. 이규상이 만난 표철주는 
    ‘집주름’이었다. 집주름이란 요즘의 부동산중개업자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70여 세였으며, 귀가 먹고 이도 빠지고 등이 굽은 늙은이로 쇠로 만든 삽을 지팡이 삼아 
    짚고 다니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철주란 이름 역시 쇠삽을 짚고 다녀서 붙은 것일 터다. 
    일흔이 넘은 표철주는 초라한 노인이지만, 소싯적에는 “용감하고 날래며 사람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동궁에 있을 때 호위하던 세자궁의 별감(別監)이었다. 늘 황금색 바지를 있었는데, 
    비가 와서 옷이 젖으면 새 바지로 갈아입을 정도로 깔끔하고 사치스런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젊은 날의 사납고 불평스런 기색이 있었다. 
    이규상이 표철주에게 물었다. 
    “너는 마치 미친 사람 같구나. 평생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표철주가 한참 귀기울이고 주름진 입술을 달달 떨더니 몸을 뒤집고 철삽을 세우며 말했다. 
    “장사또가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
    내가 죽지 않는 것은 장사또를 지하에서 만나기 싫어서지.” 
    또 검계 사람들의 일을 상세히 전해주며 
    “적잖은 호한들을 장사또가 죄다 죽여버렸지.” 
    표철주가 공포에 떠는 장사또는 다름아닌 장붕익이다. 이야기로 보아 표철주는 
    한참 외지로 도망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어쨌거나 장붕익이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검계의 인물을 잡아 죽인 일이 검계 구성원에게는 
    일대 공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장붕익은 조폭을 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소탕해버렸던 것이다. 
    
    ■ 머리를 기른 중 
    
    검계에 관한 모든 정보는 여기서 끝난다. 그럼 이야기는 끝인가. 이규상은 검계에 대해 
    더 언급할 수 있는 중요한 여지를 남겨 두었다. 위의 인용문에 검계 구성원이 
    자신들을 ‘왈자(曰字)’라고 칭했다는 부분에 주목하자. 
    별 소용은 없겠지만, 왈자를 사전에서 찾아보자.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왈자를 ‘왈짜’라 쓰고, “①왈패 ②미끈하게 잘 생기고 여자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왈패” 항에서는 “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러운 사람. 
    흔히 여자에게 대하여 쓴다”라 정의하고 있다. ①의 정의는 주로 여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니,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②는 확실한가? 이건 오입쟁이에 한정된 것이다. 
    별 도움이 안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왈자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연암 박지원은 ‘발승암기(髮僧菴記)’라는 글에서 ‘왈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발승암’이란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의 호다. 김홍연(金弘淵)이란 사람의 호가 발승암이고, 
    여기에 대해 그가 기(記)를 지어준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머리를 기른 중’이라니. 
    김홍연은 기사(騎射)에 능해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힘은 능히 손으로 범을 잡고 
    기생 둘을 끼고 몇 장의 담을 넘으며, 녹록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집안이 본래 부유하여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고 고금의 법서(法書)와 명화, 금검(琴劍) 
    이기(彛器) 기화이훼(奇花異卉)를 모으되,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준마와 명응(名鷹)을 좌우에 두었다. 
    어떤가. 재물을 분토처럼 쓰며 기방에 드나들고, 힘이 장사인 인간이다. 거기다 예술취향까지 있다. 
    김홍연은 개성 사람이다. 한말의 문장가 창강 김택영도 개성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개성 사람은 망국의 유민이라 출세를 할 수 없었다. 김택영 역시 이런 연고로 문한(文翰)에 
    탁월한데도 출세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개성인으로서 자의식이 매우 강했기에 
    개성 사람 중에 이름을 전할 만한 인물들을 골라 ‘숭양기구전’이란 전기집을 엮었다. 
    여기에 김홍연이 나오는 것이다. 
    김홍연의 집안은 부자로 묘사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서적과 고서화를 많이 사주며 
    유업(儒業)을 권했다. 아버지는 아마도 부유한 상인이었을 터이고, 그게 한이 되어 
    자식에게 과거 공부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연은 학업을 팽개친다. 이유는 과거에 
    골몰한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과로 옮긴다. 무예가 탁월했음에도 무과를 포기한다. 
    말인즉 “시골구석에서 무과에 급제한들 대장군의 인끈을 찰 수 있으랴”라고 하였으니, 
    개성 출신이라는 것이 출세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남겨 놓는다. 조선의 차별적 체제가 낳은 불우한 인물인 것이다.   
    
    ■ 차별이 낳은 반항아들 
    
    연암은 김홍연을 ‘활자(闊者)’라 부르고, 활자에 대해서 다시 “대개 시정간에 
    낭탕우활(浪蕩迂闊)한 자의 칭호로 이른바 협사 검객의 부류와 같은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낭탕우활하다는 말에는 방탕하고 어리석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생업을 돌보지 않고 낭비벽이 심한 성격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왈자와 검계의 관계를 한번 더 따져보자. 김홍연의 경우, 분명히 기존체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검계의 구성원처럼 반사회적 인물로 볼 수는 없다. 
    뒤에 소상히 언급하겠지만, 왈자의 활동공간과 검계의 활동공간은 일치한다. 
    즉 이규상의 ‘장대장전’에서 검계가 자신들을 ‘왈자’라고 칭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즉 검계나 왈자나 모두 도박장이나 기방, 술집 등 
    도시의 유흥공간을 주무대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김홍연의 경우 기생을 끼고 담장을 넘었다는 
    기록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왈자와 검계는 상호 완전히 일치하는 것인가?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표철주를 불러오자. 표철주는 연암 박지원의 글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연암은 18세기 서울 시정의 거지 출신으로 상가에서 신용을 쌓아 신의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던 ‘광문(廣文)’ 이야기를 전으로 쓴다. ‘광문자전(廣文者傳)’이 그것이다. 
    표철주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광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문 이야기는 한시(漢詩)로, 
    전(傳)으로 변형되어 기록에 남아 있다. 이름을 ‘달문(達文)’이라고 쓴 곳도 있다. 
    거지였던 광문은 나이가 들자 약국 점원이 된다. 하루는 약국 주인이 자신의 돈궤를 바라보다 
    또 광문을 쏘아보다 하며 무슨 말을 할듯말듯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눈치를 준 것이 
    여러 날이었다. 광문은 영문을 몰라 묵묵히 앉아 있을 뿐 그만두겠노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인의 조카가 돈꾸러미를 가지고 찾아왔다. 
    “지난번에 돈을 꾸러 왔다가 안 계시기에, 제가 방에 들어가서 그냥 가져갔지요.”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광문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소인일세, 점잖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니 자넬 볼 면목이 없네.” 
    주인은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친구와 거래하는 부자, 상인들에게 칭찬했다. 
    이로 인해 광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광문은 신용 있는 사람이라, 
    대금업자들도 광문이 보증을 서면 패물이나 가옥 따위의 저당물이 없어도 
    쾌히 돈을 빌려 주었다. 
    광문은 서울의 기생가에서도 이름난 사나이였다. 서울의 명기(名妓)로 제아무리 미색이라도 
    광문이 이름을 내주지 않으면 한푼의 값도 없었다. 밀양 출신 기생으로 검무를 잘 추었던 
    명기 운심(雲心)이도 내로라하는 오입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광문의 장단에 춤을 추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광문이 어느 날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하옥된다. 물론 무고였기에 다시 풀려난다. 
    광문이 풀려난 다음 이야기 역시 연암의 붓끝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이 ‘광문자전’ 끝에 붙인
     ‘서광문전후’이다. 여기에 표철주가 등장한다. 광문이 옥에서 놓여 나오자 노소 없이 
    구경을 나가 서울의 저자가 여러 날 텅 빌 지경이었다. 광문이 표철주를 보고 말했다.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 아니냐. 이제는 늙어서 별수 없구나.” 
    망동은 표철주의 별호였다. 이어서 근황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했다. 광문이 묻는다. 
    “영성군과 풍원군은 무양하시냐?” 
    “이미 다 돌아가셨단다.” 
    “김군경이는 지금 무슨 구실을 다니느냐?” 
    “용호영의 장교로 다니지.” 
    “그 녀석 미남자였거든. 몸은 좀 뚱뚱했지만 기생을 끼고 담장을 뛰어넘고 돈쓰기를 
    똥과 흙처럼 했지. 이제 귀한 사람이 되어서 만나볼 수도 없겠구나.” 
    광문이 옥에서 나와 맨처음 이야기를 건넨 사람은 표망동이다. 이어 두 사람은 공히 아는 사람들 
    안부를 묻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사이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그냥 안면만 있는 사이가 아니다. 둘은 한 그룹이 되어 어울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광문의 행동에는 반사회적인 속성이 없지만, 표철주에게는 
    반사회적인 속성이 있다. 광문의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 아니냐”는 첫마디는 
    표철주의 성격을 ‘폭력성’으로 집약하고 있다. 폭력이 사태 해결 수단이라고 믿는 것은 
    깡패와 조폭의 고유 성격 아닌가. 즉 검계 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인 것이다. 
    
    ■ 검계는 왈자의 부분집합 
    
    나는 검계와 왈자는 집합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검계는 왈자에 포함된 부분집합이다. 
    검계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왈자가 되지만, 모든 왈자가 곧 검계는 아닌 것이다. 
    즉 김홍연과 같은 사람은 왈자지만, 검계는 아닌 것이다. 왈자와 검계는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공유하지만, 그 폭력의 방향이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향할 때, 즉 강간, 강도 등의 행위로 향할 때 
    검계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조직화할 때만. 
    그렇다면 다시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왈자가 된단 말인가. 
    ‘게우사’라 불리는 국문소설이 있다. 이것은 이름만 남아 있고 작품은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려진 
    판소리 ‘왈자타령’이다. 여기에 왈자들이 기방에 모인 장면이 나온다. 
    청루(靑樓) 고당(高堂) 높은 집에 어식비식 올라가니, 
    ① 좌반의 앉은 왈자 상좌의 당하(堂下) 천총(千摠) 내금위장(內禁衛將) 소년 출신 
    선전관(宣傳官) 비별랑(備別郞) 도총(都摠) 경력(經歷) 앉아 있고, 
    ② 그 지차 바라보니, 각 영문(營門) 교련관(敎鍊官)의 세도(勢道)하는 중방(中房)이며, 
    각사 서리(書吏),북경(北京) 역관(譯官), 좌우(左右) 포청(捕廳) 이행군관(移行軍官), 
    대전별감(大殿別監) 울긋불긋 당당홍의(堂堂紅衣) 색색이라. 
    ③ 또 한편 바라보니 나장(羅將)이 정원사령(政院使令) 무예별감(武藝別監) 섞여 있고, 
    각전시정(各廛市井) 남촌한량(南村閑良) 
    ④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선소리 송흥록이 모흥갑이가 다 있구나
    (‘게우사’: ‘한국학보’65, 일지사, 1991년) 
    ① ② ③ ④로 나눈 것은 이들의 신분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①은 무반으로서의 양반이다. 
    원래 양반이 기방에 드나드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반의 경우이고, 
    무반은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출입이 가능하였다. 이들은 양반 중에 왈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뭐라 해도 왈자의 중추 세력은 역시 ②와 ③이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기술직 중인이 있다. 
    북경에 드나드는 역관(譯官)인데, 이들은 의관(醫官)과 함께 중인의 대표적인 존재다.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에 드나들면서 무역을 하기 때문에 부자가 많다. 
    둘째 각사 서리(書吏)가 있다. 곧 서울 중앙관서에 근무하는 경아전(京衙前)이다. 
    경아전은 중인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계급이다. 
    그 다음 ‘각 영문 교련관의 세도하는 중방’이란 대개 군대의 장교를 말한다. 
    ‘포청 이행군관’은 포교(捕校)인 것같고, 나장(羅將)은 의금부 나장을, 정원 사령은 
    승정원 사령을 말한다. 나장과 사령은 원래 다른 관청에도 있고 또 천역(賤役)이지만, 
    의금부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사회적 위상이 경아전과 같다. 
    대전별감은 대전, 곧 임금 주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며, 
    무예별감은 임금의 호위무사다. 각전시정이란 서울 시전의 상인이다. 
    상인들 역시 서리와 같은 사회적 위상을 지닌다. 남촌한량이란 서울 남산 기슭에 주거하며 
    무과를 준비하는 자란 뜻이지만, 그것의 정확한 사회적 의미를 밝히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②와 ③에 등장하는 부류는 거개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조선사회의 중간계층이다. 
    여기서 꼼꼼히 따질 수는 없지만, 대개 서로 통혼(通婚)을 할 수 있는 
    그런 부류로 보면 될 것이다. 
    왈자는 대체로 조선시대의 중간계층을 모태로 하여 
    나온 존재들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양반도 일부 끼어들고, 중간계층 아래의 상민도 
    일부 끼어들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왈자 패거리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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