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섰다와 짓고땡으로 날 새는 줄 몰랐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도박이 극성을 부린다. 조선사회에도 도박은 있었다.
도박이 횡행할 때 미래는 암담했고 백성들은 고달팠다.
‘쪼기’ ‘도리짓고땡’이 그 모습을 드러낸 조선시대 도박의 세계로 떠나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자 로마 병사들은 주사위를 굴려 예수의 옷을 나눠가지는 내기를 했다.
경주 안압지에서는 내기용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은 부처와
저포(樗蒲·쌍륙雙六)로 내기를 하여 미인을 얻었다. 도박의 종류는 무수하고 다양하다.
화투·포커·마작·슬롯머신·바카라·룰렛 등 우리는 아마도 그 명칭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도박은 불법이 아니다. 라스베이거스, 모나코의 도박장, 경마·복권 등 제도화된 도박을 상상해 보라.
이처럼 도박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한 인류의 공통적 경험이며, 골몰과 찬미의 대상이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도박에 골몰하게 하는가? 도박은 인간의 본성에 관계된 것인가?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도박에 탐닉하는 프로그램이 장치되어 있는가?
도박은 게임과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어떤 것(대부분 화폐로 환원된다)이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가 결합했을 때만 도박이 된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고스톱은 도박이 아니다.
게임 없이 재물을 주고받는 것은 자선사업일 뿐이다. 게임의 종류는 한정이 없다.
위에 든 것 외에 동전의 홀수·짝수 맞히기도, 가위바위보도 도박이 된다.
■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 올리기
내 생각에 도박은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 최적의 먹이획득이론.
생명체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먹이를 획득하려 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이 원리의 제도화다.
도박과 자본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노동과 합리적 경영을 필수적인 매개물로
표방하지만(표방만 한다. 실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도박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생략한다.
즉 도박은 노동과 합리적 경영을 생략한 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획득하려 한다.
도박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불확실성. 도박은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맡긴다. 도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필연과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과 불확실성일 뿐이다. 이것이 도박의 세계관이다.
도박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도박의 유행 정도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손에서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낮은 생산력의 사회에서 도박이 성행할 확률은 높지 않다. 높은 생산력은 도박을 성행케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도박이 성행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경제적 후진사회에서도 도박은
성행할 수 있다. 이래서 둘째 조건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도박이 성행할 수 없다. 도박은 불확실성의 증가에 따라 성행한다.
이 글에서 나는 조선후기 사회와 도박의 관계를 검토한다. 경제적 변화가 역사학의 관심사라면,
그것이 인간의 구체적 일상적 삶과 의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내 관심사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들이 도박에 탐닉하는 것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것은 ①바둑 ②장기 ③쌍륙 ④투패(鬪牌 즉 마조馬弔인데, 보통 투전
鬪錢이라 한다·) ⑤강패(江牌 즉 골패骨牌 원주) ⑥척사(擲柶 우리나라 풍속의 윷놀이·원주)이다.
‘대명률’에 ‘모두 장(杖) 80에 처한다’고 한 것은 어떤 놀이를 막론하고 재물을 걸고 도박한 자는
장 80에 처한다는 것이다. 무릇 놀이로써 재물을 취하는 자는 그 형률이 모두 같은데 오직 바둑은
천한 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니 구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산은 여섯 가지 도박을 들고 있는데, 여섯 가지 모두가 균등하게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미리 말하자면 다산이 같은 글에서 지적했듯,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투전·골패·쌍륙이었고,
그 중에서 투전이 조선후기 도박계 제왕의 지위를 점하였다. 바둑·장기·윷놀이는 조선후기에 생겨난
종목이 아니라, 고래로 있었던 것이고 도박으로 특별히 유행한 것도 아니니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 도박계 패권 차지한 투전
투전은 뒤에 본격적으로 살필 것이므로 우선 쌍륙과 골패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쌍륙은 체스판과 같은 장기판에 쌍방 16개의 말을 일렬로 배열하고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그 숫자에
따라 말을 전진시켜, 원래 자기 말이 있던 라인에서 모든 말이 먼저 다 벗어나는 쪽이 이긴다.
쌍륙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보이니 고려 때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다.
쌍륙은 남성들보다는 여성들 사이에 성행하였다.
지금도 안동지방 고가(古家)의 여인들 사이에 간간이 행해진다.
골패는 가로 1.2㎝∼1.5㎝, 세로 1.8㎝∼2.1㎝의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긴 것으로 모두 32쪽이다(요즘의 마작과 비슷하다).
노는 방법에는 꼬리붙이기·포(飽)·여시·골여시·쩍쩍이 등이 있는데 매우 복잡해 여기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꼬리붙이기’를 예로 들면, 12짝을 갈라 한 사람이 패를 내면 상대방이 낮은 패를 계속 내 더 이상
낮은 숫자를 낼 수 없으면 진다(여기에도 더 복잡한 룰이 있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생략한다).
골패는 쌍륙보다 더 유행한 종목이었다. 민요까지 나왔을 정도다.
“얼싸 오날 하 심심하니
훗패 작패 하여 보자
쌍준륙에 삼륙을 지르고
쌍준오에 삼오를 지르니
삼십삼천이십팔수
북두칠성이 앵돌아졌구나”
(경상도 민요 ‘골패타령’)
조선후기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투전(鬪錢 또는 投錢이라고도 쓴다). 조선후기는 물론
19세기 말 화투가 수입되기 전까지 도박계를 완전히 석권했고, 화투가 수입되자 그 놀음 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 40 대 이상이면 아마도 화투 2장을 쥐고 하는 이른바 ‘쪼기’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쪼기는 고스톱이 화투판을 석권하기 전 오랫동안 유행하던 종목이다.
쪼기의 ‘땡’과 ‘족보’, 그리고 ‘짓고땡’ 종목은 모두 투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이국(異國)에서 수입해온 ‘화투’에 민족적인 정조를 불어넣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한 투전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정조(正祖) 때의 학자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의하면,
숭정(崇禎·1628∼44) 말년에 역관(譯官) 장현(張炫)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것이라고 하였다.
투전이 중국에 기원을 둔 것이란 말인데, 도대체 중국의 어떤 도박을 수입했던가? 투전은 원래 중국의
마조(馬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데, 19세기 인물인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誌)’에 의하면,
마조는 원대에 시작됐으며 중국 고금의 인물을 품제(등급을 매김)한 120장으로 된 놀음이라고 한다
(마조에 대해서는 이상의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떤 룰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120장짜리 마조를 간략화한 것이 투전이다. 투전은 80장(혹 60장짜리도 있다)의 종이 쪽지로 구성되는데,
그 폭은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15㎝정도이다. 한 면에 사람·물고기·새·꿩·노루·별·토끼·말 등의
그림이나 글을 흘려 적어 끗수를 표시한다. 같은 글자(그림)가 10씩 모여 80장을 이루는데,
이것을 팔목(八目)이라 한다. 각각의 명칭도 달라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인장(人將)을 황(皇), 어장(魚將)을 용(龍), 조장(鳥將)을 봉(鳳), 치장(雉將)을 응(鷹), 성장(星將)을
극(極), 마장(馬將)을 승(乘), 장장(獐將)을 호(虎), 토장(兎將)을 취(鷲)라 한다고 하였으며,
사람·물고기·새·꿩은 노(老)로 사용되고, 별·말·노루·토끼는 소(少)로 사용된다고 하나,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기는 어렵다. 투전목에는 손을 타도 훼손되지 않게 기름을 먹였다.
투전은 이에 쓰는 투전목이나 참가인원 또는 내용에 따라 ‘돌려대기’ ‘동동이’ ‘가구’ ‘우등뽑기’
따위로 나뉘며, 한 가지 방법에도 몇 가지 세목이 있다.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은 80장 모두를 쓰는
‘수투전(數鬪?)’인데, 노는 방식이 대단히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 현재 수투전에 대해서는
조지훈(趙芝薰)의 ‘수투전교(數鬪?巧)’란 논문이 있는데, 이 논문을 집필할 때 이미 수투전은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주곡(注谷)을 제외하고는 하는 곳도 없고, 또 노는 방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논문을 읽고 그 방식을 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또 알아 무엇하겠는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투전방식을 알아보자.
돌려대기(이것은 아마도 ‘짓고땡이 투전’과 같은 것으로 짐작된다)는 가장 널리 놀던 것으로,
40장의 투전목을 쓴다(60장을 쓰기도 한다). 선수가 판꾼 다섯 사람에게 한 장씩 떼어 모두 5장씩
나누어주면 판꾼들은 각기 3장을 모아서 10, 20, 30을 만들어 짓고 나서, 나머지 2장의 숫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만약 3장을 모아도 지을 수 없는 사람은 실격하며, 2장의 숫자가 같으면
‘땅’(혹은 땡)이라 하는데, 이 중에서 ‘장땅’이 가장 높으며, 9땅, 8땅의 순서로 낮아진다.
‘땅’이 아닌 경우에는 2장을 합한 것의 한자리 수가 9가 되면 갑오라 하여 가장 높고
9, 8, 7, …의 차례로 내려간다. 그리고 갑오가 되는 수 가운데 1과 8은 ‘알팔’, 2와 7은 ‘비칠’이라 하고,
5가 되는 수 중에서 1과 4는 ‘비사’라고 부른다. 2장을 더한 수가 10 처럼 한자리수의 끝이 0 이 되는
경우에는 ‘무대’라고 하여 가장 낮은 끗수로 친다.
잠시 투전판에서 유행되던 족보의 이칭에 대해 간략히 감상하자.
‘삼팔돛대가보’는 3과 8과 8이 합하여서 가보가 될 때, ‘섰다 벗었다 안경가보’는 1과 8이 합하여서
가보가 될 때, ‘일장통곡하는구나’는 1과 10이 합한 가장 끝수가 낮을 경우, ‘기운센놈’은 10과 4가
합한 끗수일 때에 하는 말인데 흔히 ‘장사’라고도 한다. 재미있지 아니한가?
이 외에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동당치기’ ‘가보치기’ 등이 있는데, 동당치기는 투전 40장을
여섯 장씩 나눠가지고 같은 자를 두 장 혹은 석 장씩 맞추는 노름이다. 가보치기
(갑잡골, 갑자꼬리, 가보잡기)는 40장씩 가지고 두 장씩 혹은 석 장씩 뽑아서 아홉끗을 짓는 노름이다.
이제 도박판의 현장을 볼 차례다. 정조 때 비정통적 산문체(散文體)를 구사하고 이단적 사상
(천주교)에 물들었다 하여(사실은 아님), 죽임을 당했던 문인 강이천(姜彛天·표암 강세황의 손자)은
18세기 후반기 서울의 풍속을 상세히 묘사한 106수의 한시 ‘한경사(漢京詞)’를 남겼는데,
여기에 도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길게 자른 종이에 날아갈 듯 꽃모양 그려 / 둘러친 장막 속에 밤도 낮도 모를레라.
판맛을 거듭 보자 어느새 고수 되어 / 한마디 말도 없이 천금을 던지누나.
紙板長裁花樣? , 深圍屛幕沒朝昏.
賭來多局成高手, 擲盡千金無一言.
네 사람 마주앉아 도박판을 열고서 / 골패 여덟 짝 나누어 쥐었네
그중 한놈 좌중 향해 제 끗발 자랑하며 / 1전으로 10전을 한꺼번에 따오네.
四人相對戱場開, 牙骨分持共八枚.
獨向坐中誇牌格, 一錢賭取十錢來.
앞의 작품은 투전판이고 뒤의 작품은 골패하는 장면이다. 좀더 클로즈업해 보자.
⑴ 천하 잡것 무숙이 아무런 줄 모르고서 이새 돈을 좀 아니쓰니 그날부텀 또 놀아나는데,
신명을 부쩍 내어 골패 놀음을 시작한다. 잡기 일수 오입장이 사오 인을 청좌하여 밤노름을 부쳐 놓고
좌우 쌍촉 돋우어 켜고 중두내기 판을 차려 순끗주기 시작한다. 홰홰 둘러 패를 친즉 무숙이는
관을 잡고 고나치는 제 사면을 둘러보니 삼칠이는 쌍기 잡고 좌우편 대사와 사십 이상 혹겨하니
다만 행전 무숙이라. 사오차 대격 치르니 남은 돈이 얼마러냐, 톡톡 털어보니 두 돈 오 푼 남았구나.
⑵ 한편이서는 네 대갈수야 오구일성(五九一星)이로고다. 어렵다. 조장(鳥將)원 맞추기 반(半)씩 하자.
석류 먹든 씨나 그만 있소. 척척 쳐서 섞어 쥐어라. 셕조(夕鳥)는 하공정(下空庭)이로고나.
바닥 둘째 잎을 내소. 어데 갈까? 이 애 하자던 반이나 하자.
또 한편에서는 삼십삼쳔(三十三天) 바로 쳤다. 민둥이를 들이소. 당당홍의(堂堂紅衣) 증초립에
건양재(建陽峴)를 넘는구나. 벌거하다, 이사칠(二四七) 들이소.
⑴은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게우사’의 일부인데, 골패하는 장면이고, ⑵는 ‘춘향전’의 이본인
‘남원고사(南原古事)’의 일부로 투전하는 장면이다. 보다시피 알 수 없는 대목이 많다. 나는 이 부분에
각주를 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어쨌건 도박하는 장면을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하자.
■ ‘하우스’ 개설자는 엄히 처벌해야
도박의 성행과 함께 도박장에는 오늘날 우리가 전문도박꾼 내기 도박판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행태가 벌어졌다. 도박에 미치면, 밤이고 낮이고 ‘본성을 잃어버리고 넋이 나간(失性喪魄)’ 채로
봉두난발에다 눈이 시뻘게져서 귀신 꼴이 되는 것(윤기·尹햍, ‘無名子集’,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도박장을 개설해 돈을 뜯고 사는 인간도 물론 있었다.
“집에 투전(投?)꾼을 모으고 돈을 대주며 이자를 거두거나 또는 ‘방값(房價)’ ‘기름값(油價)’
‘밥값(飮食價)’ 등의 명목을 두어 생리(生理)로 삼는 자가 있으니,
이는 곧 뚜쟁이와 같은 부류라 내가 입에 올리기도 싫다”(윤기의 無名子集 중).
도박장을 개설하고 고리로 이자를 놓거나 자릿세를 뜯는 자들까지 나왔던 것이다.
다산이 “도박장을 설치하고 노름판을 주관한 자는
형률에는 비록 죄가 같을지라도 이는 원흉이니
그 벌이 마땅히 배가 무거워야 한다”며
가혹한 처벌을 요구한 발언으로도 전문적 도박장의 성황을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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