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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6. 이백 (李白)
    중국의 고전 /시와 산문 2019. 1. 15. 20:12

    406. 이백 (李白)

     

     

    당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시대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며 살아간 천재 시인이다. 성은 이(), 이름은 백(),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淸蓮居士)라고 한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며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시사의 거성으로 추앙받는다. 자유롭고 장엄한 시풍을 보인 그는 자신의 시와 잘 어울리는 생애를 보냈으나, 중국의 지식인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정치적 활약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이백(701~762)의 시대는 당나라 현종의 치세(712~755)와 거의 겹친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최고로 번성하던 시대였다. 시사(詩史)에서도 황금기로 꼽힌다. 율시(律詩)와 절구(絶句) 등 우리가 흔히 한시(漢詩)라 부르는 형식이 완성되었고, 전당시(全唐詩)에는 5만 수에 가까운 시가 집성될 정도로 번성했다. 이백은 두보와 함께 당나라 때의 시인의 정점에 선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들은 당시(唐詩)라는 높은 산의 출중한 두 봉우리였다.

     

    이백은 문학사적으로는 한나라와 위나라, 육조시대 이래의 시를 집대성하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두보에게 그 전통을 물려주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집으로는 송나라 때의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이 있고, 뒷날 각종 주석 연구를 집성한 것을 바탕으로 청나라 때 왕기(王琦)이태백문집집주(李太白文集輯註)를 펴냈다.

     

     

     

     

    살아서는 천재, 죽어서는 전설이 된 시선

     

    李白一斗詩百篇

    이백은 술을 마시면 시상(詩想)이 샘물처럼 솟아올랐고

    長安市上眠酒家

    늘 장안의 저잣거리 술집에서 취해 있었다.

     

    이백의 후배로 이백과 함께 후세에 이두(李杜)’로 불린 두보는 경애하는 선배 시인을 이렇게 노래했다. 또한 장안의 원로 시인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을 적선인(謫仙人)’(천상에서 추방당한 신선)이라 평했다. 이렇게 동시대에 형성된 이백의 이미지는 그대로 후세로 이어져 전설화되었다. 이백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가 술과 여자, , 달 등을 연상하는 것도 그런 전설 때문이다. 그의 일생 자체가 그런 전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어 인간 이백의 모습을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의 경계선에서 뿌연 그림자만 드러내는 모습이야말로 진정 이백답다 할 것이다.

     

    이백은 701년에 서역의 쇄엽(碎葉)에서 태어났다. 그가 페르시아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버지가 서역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어서 서역과 중국 본토를 오갔다고 하니 사실일지도 모른다. 5세 때 그의 일가는 촉(), 곧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가까운 곳으로 이주했다. 그 후 25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이백은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한때는 협(, 주먹 조직)의 세계에 몸을 던지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도사와 함께 산속에 틀어박혀 수백 마리의 새를 기르며 살기도 했다. 민산(岷山)과 대천산(戴天山), 아미산(峨眉山) 등 촉의 명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25세 때 이백은 촉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넓고 넓은 중국 땅, 그 무렵의 감각으로 보자면 세계의 중심지인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뒷날 그는 그때의 출발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나이는 세상에 큰 뜻을 품고

    칼을 지팡이 삼아 고향을 떠나

    부모와 작별하고 먼 곳을 노닌다

     

    그가 말하는 큰 뜻이란 간단히 말해 조정에 나아가 입신출세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천하를 태평하게 하기 위함이다.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지원이 있었던 듯 이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각지로 다니며 사람을 사귀었다. 이렇게 하여 이백이라는 이름이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윽고 수도 장안에서도 수행을 거친 도사의 신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즉석에서 화려한 시를 읊는 시인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은 장안시대

     

    742, 곧 이백의 나이 42세에 비로소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처자가 있었지만 아무런 미련 없이 이별을 고하고 수도로 향했다.

     

    이백은 한림공봉(翰林供奉, 문서의 초안을 잡는 관리)이라는 직위에 올라 현종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백은 당연히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위가 주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는 허망하게 꺾이고 말았다. 만년에 접어든 현종이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종은 도교에 심취해 불로장생을 염원하면서 양귀비를 탐애했다. 간단히 말해 궁정을 한층 향략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장식물로 이백을 등용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이백은 현종이 바라는 대로 그런 역할도 멋지게 해냈다. 봄의 연회석에서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해 현종은 명가수 이구년을 불러 노래를 들으면서 모란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려 했는데, 노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도 오래된 노래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새로운 노래를 원했다. 그때 거리에서 술에 취해 노닐고 있는 이백이 불려왔다. 이백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시를 써 내려갔다. 그 시가 청평조사(淸平調詞)3수이다.

     

     

    청평조사 2

     

    一枝紅艶露凝香

    붉은 꽃 이슬 젖어 향기 머금었네.

    雲雨巫山枉斷腸

    비구름 내리는 무산의 여신은 꿈속의 슬픔이네.

    借問漢宮誰得似

    미인 많은 이 궁전에 양귀비 더욱 아름답다네.

    可憐飛燕倚新粧

    가련한 조비연이 화장을 하면 그나마 비슷할까.

     

    술에 취해 방금 불려 온 이백이 일필휘지로 작성한 시 한 수가 이 정도였으니 갈채를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백은 술에 취해 현종의 총신이었던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는데, 그의 시 앞에선 그런 무례함도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백의 가슴은 밝지 못했다. 그럴듯한 정치적 입지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희망은 실현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며 수도 장안의 풍물을 즐기고 술과 여자로 울분을 달랬다.

     

    소년행(少年行)

     

    五陵年少金市東

    장안의 번화가를 노니는 젊은이들

    銀鞍白馬度春風

    백마에 은색 안장 봄바람을 가르네.

    落花踏盡遊何處

    떨어진 꽃잎 밟으며 어디를 가누

    笑入胡姬酒肆中

    웃으며 서역 여인의 술집으로 들어가네.

     

    이때 이백은 벌써 40세의 중년이었다. 이 시의 분위기는 그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페르시아 여인과 유리 술잔, 포도주,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마시는 술 등은 그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백은 때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보다 자유롭고 진지한 삶을 갈구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1

     

    花間一壺酒

    꽃에 묻혀 술 한 병

    獨酌無相親

    아무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

    술잔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對影成三人

    그림자와 함께 셋이 되었네.

     

    이백은 달과 그림자와 셋이서 춤을 추고 노닐다가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이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를 노래한 다음, 이백은 그 속내를 드러낸다.

     

    월하독작 4

     

    窮愁千萬端

    시름은 천만 가지 쌓였는데

    美酒三百杯

    좋은 술은 삼백 잔뿐이로구나.

    愁多酒雖少

    시름은 많고 술은 적으나

    酒傾雖不來

    술잔 기울이면 시름 오지 않으니

    所以知酒聖

    술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酒酣心自開

    즐겨 마시면 마음은 절로 열린다네.

     

    이어서 이백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안회(顔回)의 삶을 비판한 다음 월하독작을 이렇게 끝맺는다.

     

    且須飮美酒

    모름지기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

    고루에 앉아 달빛 받으며 취해나 보세.

     

    천만 가지 시름은 자신의 재능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입지를 얻으면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 시름이 끝도 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그런 이백의 우울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백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고력사가 일을 꾸민 것이다. 그는 양귀비에게 이백의 청평조사가 그녀를 비방한 것이라고 중상했으니, 이백이 시 속에서 양귀비를 한()나라의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비연은 미인이기는 했으나 음란하다는 평이 나돌아 결국 자살로 일생을 마감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양귀비를 비유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고력사의 변이었다. 양귀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현종에게 이백을 쫓아내라고 호소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화는 궁중에서 이백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백은 그런 음험한 궁중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744, 44세가 되던 그해 봄에 이백은 장안을 떠났다. 1년 반의 궁중 생활이었다.

     

    이백, 술과 노래와 달과 함께 지다

     

    다시 방랑 생활로 돌아온 이백은 북으로 남으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았다. 그 사이 천하는 큰 변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더니, 755년에는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이후 9년에 걸친 전란으로 양귀비는 죽고 현종은 퇴위했다.

     

    이백은 전란을 피해 여산(廬山)으로 갔다가 현종의 아들인 영왕[永王, 이름은 린()]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백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종군 시인으로 그 명성을 이용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현종이 퇴위한 뒤, 셋째 왕자가 숙종(肅宗)으로 즉위하자 영왕은 반란자로 몰려 토벌당하고 만다. 이백도 사로잡혀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친구들의 노력으로 감형되어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기 위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삼협(三峽)을 지나 무산(巫山)에 다다랐을 때, 대사면 소식을 통지받았다. 이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쁜 마음으로 다시 양자강을 내려왔다.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朝辭白帝彩雲間

    아침 햇살에 물든 구름 아래 백제성을 떠나

    千里江陵一日還

    저녁에는 천 리 강릉에 이르렀네.

    西岸猿聲啼不盡

    서쪽 강변에 원숭이 울음소리 아직 들리는데

    頸舟已過萬重山

    날렵한 배는 수많은 산들을 지나왔구나.

     

    20여 년 전, 이백은 청운의 꿈을 품고 그 삼협의 급류를 타고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내려왔었다. 지금 그의 나이 59, 기쁨에 넘치는 가슴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기쁨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끝없이 펼쳐져 있던 미래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노경에 접어든 것이다.

     

     

    추포가(秋浦歌) 15

     

    白髮三千丈

    흰 머리칼의 길이 삼천 장

    緣愁似箇長

    수심과 함께 이렇게 길어졌구나.

    不知明鏡裏

    알 수 없어라, 밝은 거울 속

    何處得秋霜

    어디서 이런 서리가 내렸는가.

     

    무언가를 추구하고 꿈꾸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생은 벌써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백은 생명력만은 잃지 않았다. 그저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다. 이백은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사했다고 하나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진다. 어느 날 이백은 양자강 채석기(采石磯)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늘 그랬듯이 술에 취해 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백 자신이 만들어 낸 술과 노래와 달의 이미지가 전해지고 중복되면서 늘 새로운 이백의 모습을 만들어 내어 다른 생명으로 숨 쉬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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