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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초한지 卷一 / 2장 黃帝의 세계(2)
    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019. 1. 1. 12:23

    우(禹)임금의 이름은 문명(文命)이요 성(姓)은 사(뾠), 씨(氏)는 하후(夏后)이다. 성은 가족계통에서 보다 큰 단위(대개 부족)이고 씨는 성 아래의 작은 단위(대개 씨족)인데, 뒷날에는 합쳐 하나로 된다. 우 임금의 성이 사(뾠)란 것은 오제(五帝)와 같은 혈통 곧 황제의 자손이란 뜻이며, 씨를 달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번성한 집안에 속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의 아버지는 곤(곤)이요, 곤의 아버지는 전욱이니, 우는 황제의 현손(玄孫)에 지나지 않는데도 벌써 씨를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堯)임금 때 홍수가 하늘까지 차 올라 산이 에워싸이고 언덕이 잠기자 백성들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요임금이 그 홍수를 잘 다스릴 사람을 찾자 여러 신하들과 사악(四嶽)이 아뢰었다.


    “곤(곤)이면 저 물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곤은 명을 어기고 종족에게 해를 입힌 적이 있어 쓸 수가 없소.”


    곤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 요임금은 그렇게 말했으나 사악이 굳이 권하였다.


    “곤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도 없으니 바라건대 시험삼아 써보십시오.”


    요임금도 달리 곤보다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사악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홍수는 9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곤은 치수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요임금은 다시 자신의 뒤를 이을 인물을 찾다가, 순(舜)을 만나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게 했다. 요임금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본 순은 곤이 제 할 일을 못하였음을 보고 그를 우산(羽山)으로 내쫓아 거기서 죽게 했다. 그리고 곤의 아들 우(禹)를 세워 그에게 치수사업을 잇게 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맡아 힘과 정성을 다한 우는 곧 요임금과 순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순이 요임금을 이어 제위에 오른 뒤에는 사공(司空)으로서 제후와 백관의 으뜸이 되어 백성들을 거느리고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우는 매우 총명하고 의욕에 차 있었고 또한 부지런하였다. 너그럽고 인자하면서도 말에는 신용이 있어 부리는 자가 믿을 수 있었으며, 행동은 법도에 맞고 사리판단은 명쾌하여 제후와 백관들이 본받을 만하였다. 거기다가 아버지 곤이 실패하여 처벌된 일을 가슴아파하여 홍수를 다스리는데 잠시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13년 동안이나 집을 나가 있으면서 어쩌다 자기 집 대문 앞을 지나게 되어도 감히 들어가 보지 못했다.


    우는 몸소 산으로 올라가 말뚝을 세워 땅의 높낮이를 표시하고, 높은 산과 큰 내를 쟀다. 입고 먹는 것을 아끼어 귀신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누추한 집에 살면서 남긴 재물을 치수에 돌렸다. 뭍길은 수레를 타고 다녔고, 물길은 배를 탔으며, 진창길에서 썰매를 쓰고, 가파른 산은 쇠를 박은 신발로 올랐다. 왼손에는 수평과 먹줄을,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곡척(曲尺)을 들고 계절을 살펴가며 천하를 정돈하였다.


    “저는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혼인한 지 나흘만에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들 계(啓)가 태어나도 돌아보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서야 겨우 천하의 물길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뒷날 우는 순임금에게 그렇게 겸손히 말했으나, 그의 골몰함은 ‘겨드랑이의 털이 모두 떨어지고, 허벅지의 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우가 구주(九州)를 개척하니 기주(冀州) 연주(쒐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梁州) 형주 (荊州) 예주(豫州) 양주(揚州) 옹주(雍州) 아홉 고을이 뒷날의 모습으로 정리되었고, 구산(九山)을 열고 이으니 천하의 아홉 개 큰 산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았다. 견산(D山) 호구산(壺口山) 지주산(砥柱山) 태행산(太行山) 서경산(西傾山 ) 웅이산(熊耳山) 파총산(C욁山) 내방산(內方山) 문산(汶山)이 그 산들이다.


    우는 또 약수(弱水) 흑수(黑水) 황하(黃河) 한수(漢水) 장강(長江) 제수(濟水) 회수(淮水) 위수(渭水) 낙수(洛水)에 제 갈 길을 열어주었다. 이른바 구천(九川)의 소통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큰 늪과 못[구택]에는 모두 제방을 높게 쌓으니 천하의 물이 함부로 넘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경기(京畿〓천자의 직할지) 밖에 오복(五服〓도성 둘레 매 5백 리마다 설치한 다섯 토지구획)을 설치하여 천자의 다스림이 사방 5천리에 미치게 하였으며, 내치(內治)에도 참여하여 고요(皐陶)나 익(益)에 못지 않았다. 순임금은 그와 같은 우의 공을 높이 사 마침내는 그를 후계자로 정하였다.


    70년이 지나 순임금이 죽자 우는 제위를 순임금의 아들 상균(商均)에게 사양하고자 양성(陽城)으로 피해갔다. 그러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버리고 우를 찾아오자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와 천자가 되고,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 또는 하(夏)라 하였다.


    제위에 오른 우임금은 신하 중에 어진 고요(皐陶)를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고요가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익(益)을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10년 뒤 우임금은 동쪽을 순시하다가 회계(會稽)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 우임금은 천하를 익에게 넘겨주었으나 익은 전례에 따라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후들이 익을 따라오지 않았다. 계가 현명한데다 익이 정사를 도맡은 지 오래되지 않아 천하의 신임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계를 찾아보고 말했다.


    “우리의 임금 하우씨(夏禹氏)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가 즉위하여 임금이 되니 이로써 하(夏)나라는 오제(五帝) 시대와는 달리 선양(禪讓)이 아닌 세습(世襲)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하 왕조의 세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수천 년 뒤 라마(羅馬〓로마)제국에서 있었던 오현제(五賢帝)의 치세와 그 씁쓸한 종장이 떠오른다. 현명한 양자(養子)를 통해 이루어진 오현제 간의 권력승계는 그들 나름의 선양이었다. 그러나안돈왕(安敦王〓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러 어리석은 친자(親子)에게 제위를 세습시키면서 라마제국의 번성은 끝나고 만다. 충분히 윤색되어 있기는 하지만, 계의 세습 또한 중국고대사의 이상이 ‘권력의 치욕’으로 오염되어간 최초의 예는 아닐는지.


    하지만 세습의 진상이야 어떠하건, 계 임금은 제후와 백성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유호씨(有扈氏)가 맞서오자 감(甘)땅에서 무찌르고 하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쳤다. 그때 육군(六軍)의 장수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감서(甘誓)>가 남아 전하는데, 적어도 과감한 군사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는 모자람이 없다.


    <들어라. 여섯 갈래 군대를 거느리는 장수들이여. 유호씨가 무력을 믿고 오행(五行)의 규율을 업신여기며,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를 저버렸으므로 하늘이 그를 쳐 없애려 한다. 지금 나는 다만 하늘의 징벌을 공손히 집행할 뿐이다. 왼쪽의 병사가 왼쪽에서 공격하지 않고, 오른쪽의 병사가 오른쪽에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을 어긴 것이다. 말을 부리는 병사가 말을 잘 몰지 않는다면 이는 또한 명을 어긴 것이다. 명에 복종한 자들은 조상의 사당에서 상을 줄 것이고, 명을 어긴 자는 지신(地神)의 사당에서 형벌을 내리고 그 자식들은 노예로 삼거나 죽일 것이다!>


    계임금을 이어 태강(太康)이 즉위하였으나 덕성이나 지혜가 아니라 핏줄에 기대 얻은 임금자리라 당장 그 폐해가 드러났다. 태강은 사냥과 음악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활 잘 쏘는 유궁씨(有窮氏)의 왕 예(웈)에게 쫓겨나 다시는 임금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못난 형 때문에 고단하게된 태강의 다섯 아우가 낙수(洛水) 가에서 부른 슬픈 노래[五子之歌]만 전해올 뿐이다.


    <……오호라, 어느 날에 돌아갈 수 있으리요. 내 가슴에 품은 이 슬픔이여. 온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기니 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꼬. 답답하고 안타깝구나, 내 마음이여. 낯이 두터워 오히려 부끄러워라. 삼가 그 덕(德)을 가꾸지 못한 탓이거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돌이킬 수 있으리.>


    하(夏)가 다시 나라꼴을 회복하는 것은 태강이 죽고 그 아우 중강(中康)이 제위에 오른 뒤가 된다. 중강임금은 세도가인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를 정벌하여 위엄을 세우고, 아들 상(相)에게 임금자리를 넘긴다. 그 뒤로도 근(늤)임금까지 여덟 대(代)를 하(夏)나라는 그런 대로 볼만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공갑(孔甲)이 제위에 오르자 하후씨(夏后氏)의 덕망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공갑임금은 귀신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매우 음란하였다. 용을 기른답시고 온갖 요란을 떨다가 유루(劉累)라는 신하로부터 버림받는 얘기가 나오는 걸로 미루어 보건대, 사치와 방자함이 진기한 초목과 짐승을 기르고 요사스러움을 섬기는 데까지 미쳤던 듯하다. 임금이 그리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은 뻔한 이치, 그때부터 제후들이 등을 돌리자 하나라는 힘으로 제후들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백성들도 잇따른 전쟁으로 괴로워졌다.


    공갑임금이 죽고, 고(皐)와 발(發)을 거쳐 이계(履癸)가 왕위에 올랐다. 바로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桀王)이다. 이때 천하의 민심은 이미 하나라를 떠났으나, 걸왕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더욱 창칼의 힘만으로 제후들과 백성들을 괴롭히며 큰소리 쳤다.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하늘에 해가 있는 것과 같다. 해가 없어진다면 모를까, 내가 망해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해를 흘금거리며 수군거렸다.


    “저 눔의 해는 언제 없어지려나. 저 해가 없어질 수 있다면 나도 함께 망해 없어져도 한이 없으련만.”


    민심이 그렇게 떠나가니 뜻 있는 제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제후들 중에 은족(殷族)의 우두머리 탕(湯)이 가장 힘 있고 덕망이 높았다. 위협을 느낀 걸왕은 탕을 불러들여 하대(夏臺)에 가두었으나 무슨 변덕인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풀려난 탕은 더욱 덕을 쌓고 은의를 베풀어 천하 제후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 뒤 마침내 걸왕을 공격하였다.


    걸왕은 허(墟)라는 곳에서 탕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지고 말았다.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끝내는 남소(南巢)로 쫓겨나 죽었다. 살아있을 때 걸왕은 가끔씩 사람들에게 한탄하였다.


    “나는 그때 하대에서 탕을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게 원통하구나.”


    그렇게 하여 하나라는 우 임금으로부터 열 일곱 대(代)만에 망하고 탕이 세운 상(商) 또는 은(殷)나라가 열린다. 하지만 핏줄로 따지면 천하는 여전히 황제의 자손에게서 또 다른 황제의 자손에게로 옮아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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