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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초한지 卷一 / 1장 젊은 자객(2)
    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019. 1. 1. 12:09

    육국(六國) 중에서 한(韓)이 가장 먼저 망하게 된 까닭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이 화평과 실리를 앞세운 진(秦)의 천하통일책 연횡론에 가장 먼저 휩쓸려 들어갔다는 점일 것이다. 한은 선혜왕 때 상국(相國) 공중치(公仲3)가 진과의 연횡을 주장한 이래로 망하는 날까지 연횡과 합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물론 한나라의 연횡론자들 중에는 진나라와 손을 잡는 게 진정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진 왕실 또한 황제(黃帝)의 자손임을 애써 우겼고, 그 백성들 또한 화하(華夏)의 한 핏줄기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더러는 현실적으로 진의 무력(武力)을 당할 길이 없어 위장된 굴복의 형식으로 연횡책을 고르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해서였든, 무지 때문이든 장량에게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 희평(姬平)을 재상자리에서 내쫓아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며 죽게 한 것도 그 연횡책이었으며, 한낱 진나라의 내사(內史)에게 나라가 망하고 왕이 사로잡히게 될 만큼 조국 한나라를 허약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연횡책으로만 여겨졌다. 한이 육국(六國) 중에서 가장 먼저 망한 것은 지리적으로 진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 또한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진나라 식으로 악용된 연횡책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장량의 눈길은 시황제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관도(官道) 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장량의 두 눈을 찔러오는 듯한 빛살이 있었다. 서북쪽 모래언덕[사구]을 돌아 나오는 갑사(甲士)들이 들고 있는 창검의 날이 뿜어내는 빛이었다. 시황제의 행차를 호위하는 시위대(侍衛隊)인 성싶었다.


    그 시위대의 규모를 보면서 장량은 적지 않이 낙담했다. 시황제가 바로 진이며, 그의 순수(巡狩)는 곧 진 조정의 움직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많은 시위대가 따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머릿수만 해도 일려(一旅〓500명)는 되어 보였다. 모두 번쩍이는 갑옷으로 몸을 둘러쌌을 뿐만 아니라 선두에는 수십 필의 기마가 길을 열고 있었다. 행렬의 앞머리가 그 정도이면 모두 합쳐서는 얼마나 많은 인마가 시황제를 호위하고 있을지 가늠조차 서지 않았다.


    시위대에 이어 몇 대의 속거(屬車)들이 굴러 나왔다. 황제의 행차에 필요한 물품들을 싣고, 걷게 할 수 없는 벼슬아치들과 시중꾼을 태운 수레들이었다. 간편하게 만든 일산(日傘)을 얹고 허리 높이에 이르는 난간을 둘렀을 뿐, 사방을 막지 않은 통상의 수레로 네 마리 말이 끌고 있었다.


    속거의 행렬에 이어 다시 한 떼의 보병 갑사들이 창검을 번쩍이며 뒤따랐다. 역시 일려는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에워싸이듯 말로만 듣던 시황제의 온량거(쟆0車)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량거는 뒷날의 제례용 수레[喪需車]처럼 지붕과 벽이 있고 창을 내어, 창문을 열면 시원하고 닫으면 따뜻하게 만들어진 수레였다. 바퀴가 넷에 폭이 넓고 금은과 깃털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섯 마리 백마(白馬)가 끌었다. 온(쟆)과 량(0)이라는 글자도 그 수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서, 진시황이 직접 그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진시황만이 타던 예외적인 수레였으나, 뒷날 한대(漢代)가 되면 훨씬 더 정교하게 개량되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황실의 주된 의장(儀仗)용 수레가 된다.


    온량거를 보자 장량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한나라의 연횡론자들에게 품었던 것과는 질을 달리하는, 구체적이고도 격렬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다.


    (저기 내가 젊은 날을 다 바쳐 그의 목숨을 노려온 원수가 있다. 천하 백성을 모두 끌어내 짓이기고 쥐어짜는 폭군이 있다. 본시 자유롭게 태어난 이 세상 뭇 생령(生靈)을 법으로 얽고 창칼로 위협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으로 몰아가는 치우(蚩尤)의 화신이 다가오고 있다….)


    장량은 자신도 모르게 장검을 끌어당겨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 다급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퍼뜩 관도 가까운 모래 언덕 뒤로 뭔가가 희뜩희뜩 움직이는 게 보였다. 창해군에게서 빌려온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도 시황제를 저격하기에 보다 가까우면서도 몸을 감추기 좋은 곳으로 옮겨 앉는 듯했다.


    그 사이에도 시황제의 온량거는 느릿느릿 창해역사가 몸을 감춘 모래언덕 쪽으로 다가왔다. 미력하나마 함께 달려나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장량은 다시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늦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각기 나뉘어서 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장량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엎드린 채 먼저 창해역사가 하는 양을 살펴보기로 했다.


    오래잖아 온량거는 창해역사가 몸을 숨긴 모래언덕을 천천히 스쳐가듯 지나갔다. 갑자기 한소리 큰 외침이 우레처럼 터지면서 수레와 사람의 행렬이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이어 창해역사의 거대한 몸집이 무슨 한 마리 크고 검은 새처럼 모래언덕에서 솟구치더니 곧바로 온량거를 덮쳤다. 두 손으로 굳게 잡은 굵은 쇠몽둥이가 그대로 그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우지끈, 쾅-멀리 있는 장량의 귀에까지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온량거의 지붕이 풀썩 내려앉는 게 보였다. 일격에 수레 전체가 그대로 내려앉은 듯했다. 수레가 그 모양이 났으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또한 성할 리가 없었다.


    “맞혔다! ”


    장량은 놀라움과 감격에 아울러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외쳤다. 그런데 미처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뜻밖의 광경으로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한 대의 온량거가 서쪽 머지않은 모래언덕을 돌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섬뜩한 기분으로 눈여겨 살펴보니 뒤따르는 온량거는 그 밖에도 몇 대 더 있었다.


    흔히 사서(史書)에는 장량이 창해역사를 시켜 친 수레를 부거(副車)라 기록하고, 부거는 속거(屬車)와 같은 것으로 주(注)를 달아놓고 있다. 하지만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부(副)는 ‘여벌의’ 혹은 ‘다른’이란 뜻이 있고, 어떤 때는 속거와 구분하여 천자의 어가(御駕) 앞뒤에 따로 딸리게 한 수레로 되어있다. 진시황이 여러 번 암살기도를 경험한 인물이고 보면, 창해역사가 친 부거는 단순히 행차를 따르던 속거 중 하나가 아니라, 처음부터 암살자들의 이목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온량거와 모양을 똑같게 만들어 앞뒤에 따르게 한 부거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장량이 아연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관도 위에서는 한바탕 처절한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려앉은 수레가 빈 것임을 알아차린 창해역사가 뒤따라오는 다른 온량거로 몸을 돌리려 할 때에야 잠시 마비된 듯 굳어있던 시위대가 꿈틀 움직였다. 이어 머지 않은 곳에서 달려온 기병들이 에워싸면서 창해역사의 분전(奮戰)은 보이지 않았으나,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장량에게도 느껴져 왔다.


    에워싼 갑사들의 함성을 뚫고 들려오는 창해역사의 벽력같은 기합소리, 그리고 청동과 철기가 부딪는 소리. 가끔씩 창해역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의 담이 비로 쓸리듯 쓸리는가 하면, 그의 쇠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말 위의 기장(騎將)들이 가랑잎처럼 굴러 떨어졌다. 200 걸음이 넘는 곳이지만 피비린내까지 풍겨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창해역사의 기합소리는 점점 상처받은 짐승의 신음소리를 닮아가고 에워싼 갑사들의 함성은 사냥의 막바지에 들어선 몰이꾼들을 닮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소리 말 위의 갑사가 내지르는 기합소리가 들리더니 창해역사를 에워싼 원의 중심으로 바짝 다가간 갑사들의 마구잡이 창질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미 저항이 끝난 창해역사의 주검을 짓이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기장 하나가 무어라 외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말을 몰아 창해역사가 에워싸여 있던 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서야 장량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 끝났구나. 그는 죽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 이제 남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늦은 대로 장량 자신이 장검을 뽑아들고 말에 올라 뛰어드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기(單騎)지만 시황제가 타고 있는 것으로 가장 의심이 드는 세 번째 온량거를 덮쳐 창해역사가 못 다한 일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창해역사 때문에 날카로운 경계에 들어간 시위 갑사들의 벽을 뚫고 진시황의 수레에 이른다는 것은 이미 틀린 일이었다. 열에 아홉 목숨만 헛되이 내놓는 일이 되고 말 것임에 분명했다. 거기다가 모래언덕을 내려가며 당부하던 창해역사의 목소리가 다시 장량의 무모한 격정을 가라앉혔다.


    (그렇다. 죽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선 피하자. 여기서 달아나 다시 한번 때를 기다려 보고, 그래도 진왕 여정(呂政)을 죽일 수 없으면 그때 죽어 홀로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헛되이 죽는 것보다는 구차하지만 살아남아 그 한을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그의 협의(俠義)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윽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 장량은 가만히 모래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른풀에 묶어두었던 말고삐를 풀고 훌쩍 말 등에 뛰어올랐다.


    장량이 박차로 말 배를 차자 말은 외줄기 먼지를 보얗게 일으키며 남쪽으로 달렸다. 그 먼지 구름이 모래언덕 위로 피어올라 멀리 관도에서도 보였으나 창해역사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그 괴력에 놀란 시위갑사들은 그것을 수상히 여기며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창해역사의 얘기가 우리 설화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강원도 지방에 전승되는 창해역사 설화는 남대천을 떠내려가던 커다란 두레박에서 그를 건져냈다는 탄생설화까지 곁들여져 있다. 얼굴이 검고 힘이 장사여서 소문을 들은 장량이 강릉까지 와서 그를 데리고 갔으며, 진시황을 저격한 뒤에는 모래밭을 뚫고 삼십리나 달아나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아산에서 채록된 설화는 창해역사가 강원도 박가의 아들 삼형제 중에서 맏이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창해역사의 신원이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은 데다, 폭군 진시황을 친 쾌거인 만큼 민족정서에도 거슬리지 않아 우리 설화에 수용된 듯하다. ‘창해(滄海)’라는 말이 원래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창해군(滄海君)이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었다는 설이 있는 것도 창해역사 설화가 생기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특히 고향과 성씨를 구체화한 아산의 설화는 청주 한씨(韓氏)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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