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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기(讀書堂記) 조 위(曺偉)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8. 12. 23. 21:39
독서당기(讀書堂記) 조 위(曺偉)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 느릅나무와 녹나무)과 기재(杞梓; 구기자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수십 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동학(洞壑)1)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와 녹이(騄駬)2)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진 재주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오?
이것이 곧 독서당(讀書堂)을 지은 사유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고 문치(文治)가 날로 높아,
세종대왕께서 신사(神思)3)·예지(睿智)가 백왕(百王)에 탁월하여 그 제작의 묘함이 신명(神明)과
부합되어 생각하기를,
“전장(典章)4)과 문물은 유학자가 아니면 함께 제정할 수 없다.” 하고는,
널리 문장(文章)의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을 두고 조석으로 치도(治道)를 강(講)하고 …(중략)…
집현전 문신 권채(權採)5) 등 세 명을 보내되, 특히 긴 휴가를 주어 산 절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였고6), 그 말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7) 등 6명을 보내어, 마음껏 학업에 힘을 쓰게
하였었다. …(중략)… 지금 임금께서 위에 오르시자 먼저 예문관(藝文館)을 열어 옛 집현전의
제도를 회복하고 날로 경연(經筵)에 앉아 문적의 연구에 정신을 두어, 유술(儒術)8)을 높이고
인재를 양육하되 옛날보다도 더하였다.
병신년에 …(중략)… 정원(政院)9)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마땅히 성 밖에 땅을 골라 당(堂)을 열어서 독서할 곳을 만들라.” 하니,
정원에서 아뢰기를, “용산(龍山)의 작은 암자가 이제 공해(公廨)10)에 소속되어 폐기되었으니,
잘 수리한다면 상개(爽塏)11)하고 유광(幽曠)12)하여, 장수(藏修)13)·유식(遊息)14)하는 장소로서
이곳이 가장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옳게 여기어 관원을 보내 역사를 독려하여 두 달 만에 이룩하니, 집이 겨우
20 칸이었으나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이 각기 갖추어졌다. 이에 독서당(讀書堂)이라
사액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시었다. 신은 생각하건대 …(중략)… 만일에 한갓
선비를 기른다는 이름만 연모하여 구차히 취한다면,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하는
무리15)들이, 가만히 그 사이에 스며들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삼대의 인재는
모두 학교로 말미암았으나, 주나라의 선비 기르는 방법이 가장 상세하였고, 한나라의
교재(翹材)16)나 당나라의 등영(登瀛)17)에 이르러서는 모두 구차히 일시의 이름만을 얻었으니,
어찌 족히 이를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국가에서는 백 년 동안을 함양(涵養)하여 교화·개도
(開導)의 방법이나 장려(獎勵)·양성하는 규모야말로, 실로 주나라의 선비 기르는 법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어, 반궁(泮宮)18)과 옥당(玉堂)19) 밖에도 또 양현(養賢)하는 장소가 있어
고르기를 정밀히 하고 대우를 도탑게 한다면 …(중략)… 이에 뽑히는 이로서는 임금의
낙육(樂育)20)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중략)… 황왕(皇王)21)·제패(帝霸)22)의 도와
예악(禮樂)·형정(刑政)의 근본, 수제(修齊)23)·치평(治平)24)의 요점이 모두 이에 있으니,
사업에 베푸는 것은 노력에 있는 것이다. …(중략)…
아, 슬프도다. 글을 배우는 공력은 변화함이 귀하거늘, 이제 오늘에 한 책을 읽고서도
오히려 전과 같은 사람이요, 내일 한 책을 읽고서도 또한 그 사람이라면, 비록 아무리
크다손 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으리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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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洞壑)= 동천(洞天): 아름다운 산과 내[川]로 둘러싸인 경치가 아름다운 곳.
2) 화류(驊騮)와 녹이(騄駬): 중국 주나라 목왕(穆王)이 타던 팔준마(八駿馬) 가운데의 하나로, 좋은 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화류’는 ‘조류(棗騮)’라고도 하고 ‘녹이(騄駬)’는 ‘녹이(綠耳)’라고도 한다.
3) 신사(神思): 정신(精神).
4) 전장(典章): 제도와 문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바로 뒤에 ‘문물’이 나오므로 ‘제도’ 정도의 의미라 보인다.
5) 권채(權採):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사, 좌승지.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을 엮었다.
6) 긴 휴가를 주어 산 절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1년 정도 휴가를 줘서 독서를 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가 있었다.
7) 신숙주(申叔舟): 조선 세조 때의 문신(1417~1475).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였다.
8) 유술(儒術)= 유도(儒道).
9)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 조선 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10) 공해(公廨)=관해(官廨):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관가의 건물. =공청(公廳)․공당(公堂)․공부(公府)․공서(公署)․공아(公衙)․관부(官府)․관사(官司)․관서(官署)․관시(官寺)․관윤(官尹)․관서(府署)․아부(衙府)․전아(殿衙)․청사(廳事)․마을.
11) 상개(爽塏)=상개(塽塏): 위치가 높아서 앞을 내려다보기 좋음.
12) 유광(幽曠): 그윽하고 훤함.
13) 장수(藏修): 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
14) 유식(遊息): 마음 편히 쉼.
15)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하는 무리: 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 중국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 소왕(昭王)에게 죽게 되었을 때, 식객(食客) 가운데 개를 가장하여 남의 물건을 잘 훔치는 사람과 닭의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사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왔다는 데서 유래한 ‘계명구도(鷄鳴狗盜)’를 말한다.
16) 교재(翹材):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의 학교 이름인 듯.
17) 등영(登瀛): 영예스러운 지위에 오름을 뜻하는 ‘登瀛洲’를 줄인 말로 역시 당시의 학교 이름인 듯함.
18) 반궁(泮宮): 제후의 나라에 설치한 대학. 천자의 나라에 베푼 대학은 ‘벽옹(辟雍)’이라고 함.
19)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에, 삼사(三司) 가운데 궁중의 경서,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문원(文苑)ㆍ서서원(瑞書院ㆍ영각(瀛閣)ㆍ옥서(玉署)라고도 하였다.
20) 낙육(樂育): 즐거이 가르침.
21) 황왕(皇王): 황제 또는 임금.
22) 제패(帝霸): 황제의 패권.
23) 수제(修齊): 수신(修身), 제가(齊家).
24) 치평(治平):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해설
조위(曺偉)의 「독서당기(讀書堂記)」는. ?속동문선? 제14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기’는 어떤 사물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글. 紀事· 志· 述이라고도 함. 자기의 이론을 섞어 쓴 변체의 記도 있으며,(한국문학개론 편찬위원회 편, ?韓國文學槪論?, 혜진서관, 1991, p.542.) 비평수필(批評隨筆)로 볼 수 있다.(동 p.545 참조.)
지은이 조위(曺偉:1454-1503)는 조선 성종 때의 학자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 창령(昌寧) 사람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되어 죽었다. 유배지인 전라남도 순천(順天)에서 최초의 유배가사인 「만분가(萬憤歌)」
(安鼎福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제44책에 수록되어 전함)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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