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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부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5)
    역사이야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19. 5. 9. 12:34


    
    ■ 효종의 계획...조선군이 들어가면 한족이 일어선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포병 10만은 몇 십만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다. 청나라는 겉으론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지배층은 만주족이지만 중하위 관료를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족이었다. 지배층인 만주족은 피지배층인 한족에 비해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현재의 인구비율로 따지면 약170분의 1에 불과하다. 
    중화사상을 지닌 피지배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10만의 조선 포병이 기세를 올리며 선전하면 중국 각지에서 한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소수의 만주족으로서는 조선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한족을 상대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효종의 전략은 바로 이것이었다.
    실제로 기해독대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에 한족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 남방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유생 나석좌 등이 북벌하자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효종의 이 계획은 조선군이 힘을 갖추고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효종의 설명은 계속된다.
    "저들은 방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 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저들이 우리나라의 조공품을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두고 있다. 이는 이 물건들을 다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인 듯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효종은 흉중에 감추었던 모든 계획을 말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송시열이 답할 차례였다.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이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만대의 다행입니다. 
    하나 제갈량도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오랑캐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 하시렵니까?"
    효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이 대사를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리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 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으니 나는 나라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는 데다가, 
    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부족한 면을 채워 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와 진법을 익히게 하였으며, 
    나로 하여금 저들 속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적지에 오랫동안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가하고 있다."
    소현세자의 심양 볼모 생활이 청나라가 주도하는 세상에 대한 화해 기간이었다면 
    봉림대군(효종)의 심양 생활은 청나라에게 복수할 정보를 수집하는 기간이었다. 
    봉림대군은 어떻게 하면 현실의 치욕을 씻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면 궁마와 진법을 익히고 
    요동의 지리를 익혔다. 북벌은 이런 노력의 소산이 확신으로 승화된 신념이었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다. 그때엔 경이 물러 가도 괜찮을 것이다."
    효종은 신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자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그는 북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몸의 기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여자 관계도 삼가는 인물이었다.
    "내가 내전에 들어가는 날은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지기 또한 해이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 온당치 못한 일이 많아진다. 옛 사람들이 요절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여색과 관계가 있으니 진실로 무일의 경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 하지 않은 결과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
    효종은 실제로 인선왕후 이외에 안빈 이씨라는 한 명의 후궁을 두었을 뿐이다. 
    효종은 대의를 위해 일상의 즐거움을 버릴 줄 아는 지사였다.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 번 거사해 볼 계획이니, 경이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라."
    효종은 각 신하들의 성향을 물었다.
    "내가 보기에 송준길은 함께 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함께 할 뜻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은 기질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생각에 허적은 굳세고 용감하여 일을 맡길 수 있겠으나, 
    주색에 빠져 자못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내 일찍이 생각하기를 나와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는 오랑캐의 손에 죽은 집안의 
    자제들 뿐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는 송시열의 종형 송시형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다른 신하들이 북벌에 무관심하거나 북벌을 두려워하는 것을 질타했다.
    "내가 만수전을 지을 때 터잡는 일을 핑계로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서 놀라기만 하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다."
    신하들에 대한 효종의 질타에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신하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효종으로서 이는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다."
    효종은 이렇게까지 양보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제시하는 대안은 그저 치자의 근본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이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당파로부터 '수기형가' 네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 강빈은 과연 역적이었는가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이 출사하며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소현세자 빈 강빈에 대한 신원이었다. 
    강빈이 역모로 몰린 것은 억울한 일이니 신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강빈의 옥사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불평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효종으로서는 강빈이 무고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 경우 자신의 왕통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 문제는 여러 차례 해명한 터였다. 
    효종3년 4월에 부교리 민정중에게 설명했으며, 5월에도 여러 신하들에게 해명한 터였다. 
    물론 강빈이 역적이라는 해명이었다. 이때 효종는 "지금 역강(역적 강씨라는 뜻)을 
    구하려 하는 자들은 어찌 반역을 꾀한 자와 동등한 자가 아니겠는가"라며 화를 내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라고 '효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 7년 후에 송시열이 다시 거론한 것이다. 이때 효종은 송시열에게는 화를 내지 못했다.
    "내가 늘 경과 그 일에 대해 말하려 했는데 틈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효종은 강빈을 악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비화 하나를 공개했다.
    "강씨의 못된 짓을 어떻게 한 입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내 한 예를 들을 테니 한번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강씨는 그렇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돌아가셨을 때 대조(인조)께서 애통해 하시며, 
    '이는 잠자리를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책망하시자, 강씨는 즉각, 
    '모월 이후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발악했다. 
    그 후 자식을 낳게 되자 모월 이후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기 위해 
    곧 자식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닉하였다."
    강빈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하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여 놓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효종은 나아가 강빈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강씨의 성품이 이렇듯 악독하니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역모를 꾸민 것은 궁내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니 밖의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 일은 확연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밖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해 하고 있으니 내 가슴이 실로 아프다."
    송시열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은 증거로 인조의 전교를 들었다.
    "선왕의 전교에, '흉한 것을 땅에 묻어 저주하고 독약을 넣은 것은 
    '필시' 강씨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시'라는 두 글자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것을 억지로 단정하는 말입니다. 
    분명한 증거가 없는 사람을 대역죄로 몰아 죽였는데 
    사람들이 원통해 하지 않을 리 있습니까? 
    지금 이 '필시'라는 두 글자 때문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않고 있습니다."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자작극으로 의심받는 저주사건을 담은 전교의 허점을 
    송시열이 파고 든 것이다. 전교 자체가 강빈을 죄 없이 죽였음을 
    시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깜짝 놀라는 척했다.
    "그 점은 내가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과연 경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강씨가 역모를 꾀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다."
    효종으로서는 애매하게 말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강빈이 무고라고 말하면 종통은 자신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그녀의 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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