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 Ich bin's Ich bin's
Sop. Birgit Nilsson
Richard Wagner, 1813-1883
Tristan und Isolde /Act 3. Isolde's Aria
트리스탄의 기쁨의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부르며 달려오고,
트리탄도 이졸데를 소리쳐 부르면서 그녀의 품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간다.
이때 ‘사랑의 기쁨 동기’가 연주되면서 그들은 서로를 힘껏 포옹하는 가운데
트리스탄은 사랑하는 이졸데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한편, 이졸데는 이 참담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아! 저예요, 저예요, Ha! Ich bin's, ich bin's>라고 울부짖으며
잠간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눈을 떠보라며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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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음악에는 일종의 중독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마치 마약과 같이 재미로 맛을 보는 사이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자나 깨나 잠꼬대처럼 바그너를 흥얼거리게 된다.
설령 중독을 일으킨다고 해도 몸에서 나온 독이라 별 상관은 없지만,
중독환자라고 하는 자들은 자칫 무턱대고 타인에게도 자신의 취미를 강요해야만
마음을 놓는 경향이 있어, 그게 좀 곤란하다.
신앙의 자유는 분명 우리의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 권리이다.
그것이 부처님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예수님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동구 밖 미류나무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도
각자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일부 사이비 종교의 맹신자들처럼 무턱대고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요 의무이며 미덕이라고 굳게 믿고 벌이는 행위는
오히려 공연한 반발심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
바그너 중독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이러한 미덕의 딜레마에 빠져
종종 타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듣고 있는 사이에 그만 그 깊이에 빠져버리고 마는 바그너 음악의 함정은,
끝나는 지점을 모르게 하는, 면면히 이어지는 음의 흐름에 있다.
끊어지는 부분이 없으므로 설사 따분하다 해도
'따분하니까 그만 듣자’라는 결심이 서기가 쉽지 않다.
끝을 맺지 못한 채로 질질 끌려가다가 찬스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한번 연기한 거절이 몇 주간이나 늦어지고 나중에는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러니 가수는 죽을 노릇이다.
어지간히 폐장이 크고 건장한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바그너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인체는 안정 시에 매 분 거의 230~250cc의 산소를 섭취하고
200cc 남짓의 탄산가스를 배출해야만 한다.
따라서 숨을 쉬지 않고 긴 노래를 계속 부르면 당연히 혈중탄산가스의 양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러므로 순혈에 집착하여 탄산가스 같은 말만 들어도
불쾌해지는 신경질적인 타입의 인간은 절대 바그너 가수가 되지 못한다.
"그는 약음에서 강음에 이르는 긴 음표를 부르고는
천천히 피아노 옆에서 떨어져 전혀 호흡을 하지 않은 채
한잔의 포도주를 다 비우고 다시 피아노 앞으로 와서
트릴이 붙은 반음계의 스케일을 한 옥타브 노래하고,
이윽고는 같은 호기로 촛대의 촛불을 불어 꺼 버렸다."
이것은 윌리엄 섹스피어가 쓴,
이탈리아의 명가수 루이지 라브라케에 관한 기록이다.
훈련은 종종 인간 능력의 한계를 돌파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비단 바그너 곡의 가수가 아니더라도
훈련이 가수의 기본덕목인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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