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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전 -<3>옛 이야기/고전 小說 2019. 3. 3. 23:09
"나으리께서 정 그러시다면 편지를 써 주십시오."
"일이 되고 못 되는 것은 네 수단에 달렸으니 부디 눈치있게 잘 해라."
방자는 애랑에게 그 편지를 전하였다.
편지 내용은 한 마디로 줄인다면 다음과 같다.
'낭자를 한 번 본 후 상사의 괴로움으로 깊은 병이 들었는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낭자의 손에 매었으니 모쪼록 이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애랑이 편지를 다 읽고 나자 방자는 애랑에게 말하였다.
"답장을 하되 허투로 하지 말고 애가 타게 해라."
방자가 애랑의 답장을 받아 주니, 배비장은 애랑의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 대학지도나 읽는 듯이 읽어 내려가다가, '미친 소리 말고 마음을 바로잡고 물러가라.' 한 대목에 이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고 이일을 어찌할꼬? 섬 속에 원통한 귀신 되었구나."
곁에서 방자가 채근하였다.
"여보 나으리, 실심 마시고 그 아래를 더 읽어 보십시오. 연자가 있소그려."
배비장은 다시 보아 가다가,
"옳지, 연자의 뜻을 알았다."
하고 무릎을 치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연이나(그렇긴 하나) 장부의 중한 몸으로 나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하시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나는 규중 여자의 몸으로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만나기 어려우니 달이 진 깊은 밤에 벽헌당을 찾아와서 몰래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한 베개를 베고 자려니와 만약 실수한다면 그 몸이 위태합니다. 만약 오시려거든 집안이 번거롭고 닭과 개가 많으니 북창 쪽으로 살살 가볍게 걸어 오십시오.'
배비장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렇게도 못 견디게 정신이 몽롱하고 온 몸이 쑤시던 병도 감쪽같이 나았다.
기다리던 밤이 되자 배비장은 정장을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방자가 이를 보고 참견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나으리 소견 없소. 밤중에 유부녀 통간하시면서 비단옷을 입고 가다가는 될 일도 안 될 것입니다. 그 의관을 모두 벗으시오."
"벗다니? 초라하지 않겠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드시면 가지 마십시오."
"얘야! 요란스럽게 굴지 마라. 내 벗으마."
배비장은 방자의 말을 따라 의관을 훨훨 벗어 버리고 덜덜 떠는 것이었다.
"얘야, 알몸으로 어찌하란 말이냐?"
"그게 좋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면 한라산 매 사냥꾼으로 알겠습니다. 제주 복색으로 차림을 차리시오."
"제주 복색은 어떤 것이냐?"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리십시오."
"얘야! 그건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들거들랑 가지 마십시오."
"아니다 방자야. 네가 하라면 개가죽이 아니라 돼지가죽이라도 뒤집어 쓰마."
배비장은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렸다.
"얘야, 범이 보면 개로 알겠다. 총 한 자루만 꺼내어 들고 가자! 그러는게 안전하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겁이 나고 무섭거든 차라리 가지 마오."
"얘야! 네 정성이 그런 줄 몰랐구나. 네가 못 갈 것 같으면 내가 업고라도 가마! 어서 가자 방자야!"
높은 담 구멍 찾아가서 방자가 먼저 기어들어갔다.
"쉬! 나리,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두 발을 한데 모아 묘리 있게 들이미시오."
배비장이 두발을 모아 들이밀자, 방자놈이 안에서 배비장의 두 발목을 모아 쥐고 힘껏 당기니 부른 배가 걸려서 들어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하였다. 배비장은 두 눈을 흡뜨고 바드득 이를 갈았다.
"얘야, 조금만 놓아다오."
방자가 갑자기 다리를 탁 놓자 배비장은 곤두박질하고는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매사가 순리로 되지 않으니 낭패로구나. 산모의 해산법을 말 하더라고 아이를 머리부터 낳아야 순산이라 한다. 그러니 상투를 먼저 들이밀마. 너는 이 상투를 잘 잡고 안으로 끌여들여라."
방자놈은 배비장의 상투를 노벙거지째 와락 잡아당겼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펑 하고 들어가자,
"불을 켠 방으로 들어가서 욕심대로 얼른 놀다가 날이 새기 전에 나오십시오."
하고 방자는 몸을 숨기고는 배비장의 거동을 엿보는 것이었다. 가만가만 자취없이 들어가서 문 앞에 서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뚫고 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본 배비장은 정신이 아찔하였다. 등불 밑에 앉은 여인의 태도, 천상의 선녀를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문구멍으로 풍겨왔다. 배비장은 담뱃내를 맡고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놀랐는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소리쳤다.
"도둑이야!"
배비장은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말하였다.
"문안드리오."
"범을 그리려다 강아지를 그린 그림이로군. 아마도 뉘 집 미친 개가 길을 잘못 들어왔나 보다."
여인은 배비장의 꼴을 보다가 이렇게 말하고는 나무조각으로 배비장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배비장이 말하였다.
"나 개 아니오."
"그러면 뭐냐?"
"배가요."
계집은 배비장의 꼴을 보고 웃고 내려와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이 밤에 웬일이오?"
들어가 정담을 나눈 뒤에 불을 막 끄고 나니, 방자놈이 고함을 친다.
"불 켜놓고 문 열어라."
여인이 깜짝 놀라는 체하고 몸을 떨며 당황해할 때 방자놈의 지어낸 언성이 다시 떨어졌다.
"요기롭고 고얀 년, 내 몸 하나 옴짝하면 문 앞의 신 네 짝이 떠날 날이 없으니 어느 놈과 미쳐서 또 두런거리고 있느냐? 이 연놈을 한 주먹에 뼈를 부수어 박살내리라."
배비장은 혼비백산하여 허둥거렸으나 외문 집이 되어 도망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몸으로 이불을 쓰고 여자에게 물었다.
"그게 본 남편이오? 성품이 어떻소?"
"성품이 매우 표독합니다. 미련하기로는 도척이요, 기운은 항우요, 술을 좋아하고 화가 나면 백주에도 칼을 뽑아 피보기를 예사로 합니다."
계집의 말을 들은 배비장은 애걸복걸하면서 여인에게 매달렸다.
"낭자, 나를 제발 살려 주게."
계집은 언제 장만해 두었던지 커다란 자루를 꺼내 가지고 와서는 아구리를 벌리면서 말하였다.
"이리 들어가시오."
배비장은 이상하게 여기고 겁에 질려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거기엔 왜 들어가라는 거야?"
"들어가면 살 도리가 있으니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배비장을 자루에 담은 후에 자루끈을 모아 상투에 감아 매고 등잔 뒤 방구석에 세워 놓고 불을 켰다 이 때 방자놈이 문을 왈칵.열고 성큼 들어서며 사면을 둘러보았다.
"저 방구석에 세워놓은 것은 무엇이냐?"
"그건 알아서 뭣 하시겠어요?"
계집의 대답이 간드러지다.
"이 년아, 내가 묻는 데 대답을 할 것이지 무슨 반문이냐? 이 년 주리방망이 맛을 보고 싶으냐! 맛을 보고 싶다면 보여 주마."
계집의 음성이 더욱 간사해진다.
"거문고에 새 줄을 달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방자놈은 수그러지는 체하고 수그러진 음성으로,
"음! 거문고라면 좀 타 보자."
하고는 대꼬챙이로 배부른 등을 탁탁 쳤다. 그러니 배비장은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꿈틀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배비장은 아픔을 꾹 참고 대꼬챙이로 때릴 때마다 자루 속에서,
"둥덩 둥덩"
하고 소리를 냈다.
"음! 그 놈의 거문고 소리가 매우 웅장하구나. 대현을 쳤으니 이제 소현을 쳐 봐야겠군."
이번은 코를 탁 쳤다.
"둥덩 둥덩"
"음! 그 놈의 거문고가 이상하다. 아래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고 위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니 말이다. 이 어떻게 된 놈의 거문고냐?"
계집의 대답이었다.
"이건 특수한 거문고라서 그렇답니다."
"그러냐? 술 한 잔 날 권하고 줄을 골라라. 오늘 밤 놀아 보자. 내 소피 보고 들어오마."
방자는 문 밖으로 나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엿들었다.
자루 속에서 배비장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 자가 거문고를 내 볼 것 같으니 다른 데로 나를 옮겨 주오."
"이곳으로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윗목에 놓인 피나무궤를 열고 말하였다.
궤 속으로 들어간 배비장은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서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가 믿고 데리고 있는 방자의 계교라는 것을 어찌 알 것인가.
계집이 궤문을 닫고 쇠를 덜커덕 채우니 이제는 함정에 든 범이요, 독 안에 든 쥐였다. 배비장은 숨이 가빠져 왔다.
이 때 나갔던 사내가 다시 들어오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눈이 저절로 감겨 잠깐 꿈을 구니 백발 노인이 나 를불러, 네 집에 거문고와 피나무궤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액신이 붙어서 장난을 하므로 패가망신할 징조라 했다. 저 궤를 불태워 버려라. 어서 짚 한 단을 가지고 가서 불을 놓아라!"
배비장은 탄식하였다.
"이젠 화장인가.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이 때 계집이 악을 썼다.
"조상 적부터 전해 내려온 기물로 업귀신이 들어 있는 업궤인데 그것을 불사르라니 안 될 말이오."
"이 년아, 나는 너하고 못 살겠다. 나는 업궤를 가지고 나가겠다."
사내가 궤를 덜컥 어깨에 걸머지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계집이 붙들고 늘어졌다.
"임자가 업궤를 가져가고 나는 망하란 말이오? 이 궤는 못 놓겠소."
"그렇다면 한 토막씩 나누어 갖자."
사내는 커다란 톱을 가지고 와서 궤짝 위에 올려놓고 말하였다.
"자 어서 톱을 마주 잡고 당기자."
배비장은 더 참지 못하고 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여보소. 미련도 하오.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 하지 않소? 그 계집에게 궤를 다 주구려. 토막을 내면 못 쓰게 되고 말지 않소?"
그러자 사내는 톱을 내던지며 말하였다.
"아뿔사! 이놈의 업귀신이 도생하여 인사가 되었으니 불침으로 찌르자."
불에 단 송곳이 배비장의 왼편 눈으로 내려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궤 속의 배비장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서 악이라도 한 번 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눈의 소중함을 모른단 말이오?"
"에그! 궤신이 저 상할 줄 미리 알고 애걸하니 정상이 가엾구나. 그 몸 상하지 않도록 궤를 져다가 물에다 던져 버려라."
사내는 질방을 걸어 궤짝을 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어디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게 뭐냐?"
"업궤요."
"그 궤를 내게 팔아라."
"그러시오."
사내는 궤짝을 져다가 사또가 있는 동헌 마당에 놓고 물에 던지는 듯이 말하며 궤 틈으로 물을 붓고 흔들었다.
"궤 속 귀신 너는 들어라! 이 파도에 띄울 테니 천리길을 떠나거라."
배비장은 생각하였다.
'어허 궤가 벌써 물에 떴나 보구나. 이젠 죽었구나.'
그런데 얼마 후에 들으니 어기어차! 어기어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몰론 사령들이 지어서 하는 배 젖는 소리였다. 배비장은 소리를 질렀다.
"거기 가는 배는 어디로 가는 배란 말이오?"
"제주 배요."
"어렵지만 이 궤를 실어다가 죽을 사람 살려 주오."
"궤 속에서 나는 그 소리가 이상하다. 우리 배에 부정 탈라! 상앗대로 떠밀자."
"난 사람이니 부디 살려 주오."
"어디 사는 사람이냐?"
"제주사오."
"제주라는 곳이 미색의 땅이라, 분명 유부녀 통간 갔다가 그 지경이 되었구나."
"예, 옳소이다."
"우리 배엔 부정이 탈까 못 올리겠고 궤문이나 열어 줄테니 헤엄을 쳐서 가거라. 그런데 이 물은 짠물이니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테니 눈을 감고 가라."
사공이 쇠를 덜커덕 열어놓자, 배비장은 알몸으로 쑥 나와서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와락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렸다.
한참을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가다가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치니 배비장은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가 앉고 전후 좌우에 관속들과 기생, 노비들이 늘어서서 웃음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사또가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 그 꼴이 웬일인고?"
배비장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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