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성주황씨(星州黃氏)
■ 시조 : 황세득(黃世得)
시조 황세득(黃世得, 시호는 충장)은 고려때 문신인 황석주(黃石柱, 상주황씨 1세조)의 17세손이다.
황세득은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가 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선봉장이 되어 고금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출전하여 벽파정·고금도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1598년 예고(曳橋) 싸움에서 전사 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직산에 정문을
세워 병자호란 때 전사한 아들 황박과 함께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성주에 대대로 살면서 본관을
성주로 하였다. - 묘소는 충남 아산군 탕정면 용두리에 있으며 10월 15일 향사한다.
● 인물
황세득(黃世得)의 아들 황박(黃珀)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634년의의주부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노령으로 관직을 은퇴한 후
병자호란 때 용인에서 적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 후 숙종 때 시조 황세득이
호조 참판에 추증 되었고, 고향인 천안군 직산면 마정리에 그 부자에 대한 정문이 세워졌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황영립(黃永立,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 모두 1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무과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 항렬자
15世-영(永) 16世-식(植) 17世-희(熙) 18世-규(奎) 19世-석(錫) 20世- 21世- 22世- 23世- 24世-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16世孫은 15代孫)
● 본관 연혁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
(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
(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황씨는
1985년에는 총 1,047가구 5,157명,
2000년에는 총 199가구 60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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