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헌창, 김범문의 난(金憲昌,金梵文의 亂),
■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헌덕왕 14년(822년) 김헌창이 자기의 부친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갖고 일으킨 반란이다.
신라 말기는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으며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반역·골육상잔(骨肉相殘)의
난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헌창의 난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김헌창은 스스로 왕을
자처하며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며, 무진주(武珍州:光州)·
완산주(完山州:全州)·청주(菁州:晋州) 사벌주(沙伐州:尙州)의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忠州)·서원(西原:淸州)·금관(金官:金海) 등의 관리들과 모든 군·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였는데,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密陽)으로 갔으며,
한산(漢山:廣州)·우두(牛頭)·삽량(?良)·패강(浿江) 북원(北原:原州) 등에서는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수비하였다.
완산(完山:全州)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아찬(阿?)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서울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장군 8명으로 서울을 지키게 하고 장웅(長雄)·위공(衛恭)·제릉(悌凌)으로 헌창을 치게 했다.
장웅은 도동현(道東峴)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
(三年山城:報恩)을 공격한 다음 속리산(俗離山)에서 헌창의 군을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은 성산(星山)에서 승리하고 제군(諸軍)이 웅진에 모여 김헌창의 군대를 격멸시키니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다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김헌창은 자살했다.
그 후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김범문의 난(金梵文의 亂,825년)
신라 하대 김범문이 용인 지역을 공격하였던 사건.
김범문이 한산주를 공격할 때 한산주의 직할 영현인 거서현이 그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거서현은 지금의 용인 지방으로 비정되고 있으므로 김범문의 난을 당하여 직접적인 전투를 치룬
정병들이 바로 용인 출신의 장정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김범문의 할아버지 김주원은 원성왕과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패하여 강릉으로 축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범문의 아버지 김헌창은 자신이 도독으로 있던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하였다.
◐경과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825년(헌덕왕 17) 정월에
고달산(高達山)[지금의 여주]의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도읍을 평양 (지금의 서울 종로)에
세우고자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으나
북한산주 도독 총명(聰明)에게 토벌당하고 잡혀 죽었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왕실 내부의 모반과 반역은 결국 신라 하대의
사회적 모순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은 후삼국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기를 열게 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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