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
■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 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황보능장(皇甫能長)이다.
◎관향 -경상북도 영천군
◎시조-황보능장 (皇甫能長)
◎주요 중시조 -황보안 (皇甫安)
◎주요 인물 -황보항, 황보탁, 황보영, 황보기, 황보유의, 황보림, 황보인, 황보관, 황보혜정
◎인구(2000년) -8,877명 (289위)
●기원
황보씨(皇甫氏)는 중국 안정(安定)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신라 말에 당나라로부터 귀화한 황보경(皇甫鏡)이 한국 황보씨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역사
『영천황보씨세보(永川皇甫氏世譜)』에 의하면 황보경의 증손 황보능장(皇甫能長)이 고려 태조 때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으로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해져 그를 시조로 삼고 영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황보능장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군 고경면 창암리에 있으며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시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에 목사(牧使)를 지낸 황보안(皇甫安)을 기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 연혁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것을 초기 신라
때에는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임고군(臨皐郡)으로 개칭하였다.
925년(경애왕 2)에 고울부(高鬱府)로 고쳐 불렀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맹백현·
이지현(梨旨縣) 등의 현들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편입되었다가, 1172(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후에 주(州)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영천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신녕군(新寧郡)이 영천군으로 폐합되어 영천면을 신설하였다.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 승격했고,
1995년 영천군을 영천시에 통합하였다.
●인물
영천 황보씨는 고려조와 조선 초기에 걸쳐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세도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고려 명종 때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황보항(皇甫抗)과
대사성을 지낸 황보탁(皇甫倬)이 유명했으며, 정종 때 참지정사·평장사를 지낸 황보영(皇甫穎)과
고종 때 좌복야·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른 황보기(皇甫琦) 등이 뛰어난 인물이다.
한편 황보유의(皇甫兪義)는 고려 현종이 즉위하는데 공헌했으며 1031년(현종 22) 중추사를 거쳐
이부 상서와 참지정사를 지냈고 덕종 때는 문하평장사에 올랐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토평하고 일등공신에 오른 황보림은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부원수로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고 삼도 도체찰사가 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황보림의 아들 황보인(皇甫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 장령과 병조 판서를 거쳐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되어 10년 동안 김종서 장군과 함께 육진을 개척하였다. 그는 태종 세종
문종 3대에 걸쳐 도승지를 비롯하여 관찰사·좌찬성·우좌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조정의 중신이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영의정이 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고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 정분 등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참판을 지낸
황보석(皇甫錫)·직장(直長)을 지낸 황보흠(皇甫欽)과 소자 황보원(皇甫源), 황보문(皇甫汶) 등
다섯 사람이 화를 당하니 영천 황보씨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황보림(皇甫林, 1333년 ∼1394년) 고려말·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영천(永川). 진주목사 황보안(安)의 아들이며, 평장사 안우(安祐)의 사위이다.
안우 휘하에서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별장이 제수된 뒤 공부시랑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군무(軍務)에 밝으므로 종부령(宗簿令)에 임명되었으며,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1등공신에 녹공(錄功)되었다. 1374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의 휘하에서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하였다.
1380년(우왕 6)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전라도병마사가 되었다.
1382년 밀직부사로서 영해군(寧海郡)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도 왜구가
거령(居寧)장수현(長水縣) 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침략하자 부원수로서 여현(礪峴)에서
물리쳤다. 1385년 정월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적을 무찌르고, 1388년 4월 요동정벌(遼東征伐)
때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종군하여 위화도회군에 가담,
1390년(공양왕 2) 4월 회군1등공신에 포록(褒錄)되었다. 1388년(창왕 1) 7월에는 왜적들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경상전라도도체찰사(楊廣慶尙全羅道都體察使)가 되어 남원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1389년 6월 밀직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390년 서북면도절제사 평양윤(西北面都節制使平壞尹)에 제수되고 다음해 전라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오른 뒤 별세하였다.
황보인(皇甫仁, ? ~ 1453년) : 조선 전기의 문신.
평안도·함길도 체찰사(體察使)가 된 후 10년 동안 절제사 김종서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영의정이 되어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단종(端宗)을 보좌하다가 계유정난
(癸酉靖難)에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과거 급제자
영천 황보씨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하였다. (고려조 6명, 조선조 4명)
고려 문과 -황보관(皇甫瓘) 황보기(皇甫琦) 황보서(皇甫諝) 황보위(皇甫緯)
황보탁(皇甫倬) 황보허(皇甫許)
조선 문과 -황보공(皇甫恭) 황보규(皇甫規) 황보량(皇甫良) 황보인(皇甫仁)
무과 -황보숙(皇甫淑) 황보준(皇甫峻) 황보철(皇甫哲)
생원시 -황보신(皇甫信)
진사시 -황보탄(皇甫坦)
●인구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황보(皇甫)씨의 인구는 9,148명이다.
이 중 영천 황보씨가 2,806가구 8,877명, 황주 황보씨는 79가구 25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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