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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후지(許生後識)옛 이야기/고전 小說 2019. 1. 19. 21:21
허생후지(許生後識)Ⅰ
혹자는 이르기를,
“그이는 황명(皇明)의 유민(遺民)이야.”
한다. 숭정(崇禎) 갑진년(甲辰年) 뒤로 명의 사람들이 많이들 동으로 나와 살았으니 허생도 혹시 그런 분이라면 그 성은 반드시 허씨가 아니리라 생각된다. 세속에서 전하는 말이 있으니 다음과 같았다.
“조 판서(趙判書) 계원(啓遠)이 일찍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순행차로 청송(靑松)에 이르렀을 때, 길 왼편에 웬 중 둘이 서로 마주 베고 누웠다. 앞선 마졸(馬卒)이 비켜달라 고함을 쳤으나 그들은 피하지를 않고, 채찍으로 갈겨도 일어나지 않기에 여럿이 붙들어 끌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趙)가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는,
‘어디에 살고 있는 중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두 중은 일어나 앉아 한결 더 뻣뻣한 태도로 눈을 흘기고 한참 동안 있다가 하는 말이,
‘너는 헛된 소리를 치며 출세를 하여 감사의 자리를 얻은 자가 아니냐.’
한다. 조가 중들을 보니 한 명은 붉은 상판이 둥글고, 또 한 명은 검은 상판이 길었으며, 말하는 태가 자못 범상치 않았다. 가마에서 내려 그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중은,
‘따르는 자들을 물리치고 나를 따라 오려무나.’
한다. 조는 몇 리를 따라 가노라니 숨은 가빠지고 땀은 자꾸만 흘러 좀 쉬어서 가기를 청했더니 중은 화를 내어,
‘네가 평소에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는 언제나 큰소리를 하면서 몸에는 갑옷을 입고 창을 잡아 선봉(先鋒)을 맡아서 대명(大明)을 위하여 복수와 설치를 하겠다고 떠들더니, 이제 보아 몇 리의 걸음도 못 걸어서 한 자국에 열 번 헐떡이고, 다섯 자국에 세 번을 쉬려고 하니 이러고서 어찌 요(遼)ㆍ계(薊)의 벌판을 맘대로 달릴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어떤 바위 밑까지 닿으니 나무에 기대어서 집을 만들고, 땔나무를 쌓고는 그 위에 가 눕는 것이었다. 조는 목이 몹시 말라 물을 청하였다. 중은,
‘에퀴이, 귀인이니 또 배도 고프겠지.’
하고는, 황정(黃精)으로 만든 떡을 먹이려고 솔잎 가루를 개천 물에 타서 주었다. 조는 이마를 찡그리며 마시지 못한다. 중은 또,
‘요동 벌은 물이 귀하므로 목이 마르면 말 오줌을 마시는 것이 일쑤렷다.’
하며, 크게 호통치고는, 두 중은 마주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면서,
‘손 노야(孫老爺), 손 노야.’
하고 부르더니, 조에게,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키어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방이 소란한 것을 네가 아느냐.’
하고 묻는다. 조는,
‘들은 적이 없소이다.’
하였더니, 두 중은 탄식을 하면서,
‘네가 방백(方伯)의 몸으로서 천하에 이런 큰 일이 있건마는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는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벼슬자리를 얻었을 뿐이로고.’
한다. 조는,
‘스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였더니, 중은,
‘물을 필요가 없어. 세상에는 역시 우리를 아는 이가 있을거야. 너는 여기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렷다. 내가 우리 선생님하고 꼭 같이 와서 너에게 이야기를 하련다.’
하고는, 일어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조금 뒤에 해는 지고 오래 지나도 중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는 밤 늦도록 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밤은 깊어 푸나무에는 우수수 바람 소리가 나면서 범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는 기겁을 하고 거의 까무러쳤다. 조금 뒤에 여럿이 횃불을 켜들고 감사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는 거기서 낭패를 당하고 골짜기 속을 빠져 나왔다. 이 일이 있은 지 오래 되어도 조는 언제고 마음이 불안하여 가슴속에는 한을 품게 되었다. 뒷날, 조는 이 일을 우암 송 선생(尤菴宋先生)에게 물었더니, 선생은,
‘이는 아마도 명(明)의 말년 총병관(總兵官) 같아 보이네.’
한다. 조는 또,
‘그는 언제나 저를 깔보고, 네니 또는 너니 하고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나라 중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고, 땔나무를 쌓아둔 것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의미함일세.’
한다. 조는 또,
‘울 때면 반드시 손 노야를 찾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했더니, 선생은,
‘그는 아마 태학생(太學生) 손승종(孫承宗)을 가리킨 듯싶네. 승종이 일찍이 산해관(山海關)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만큼, 두 중은 아마 손(孫)의 부하인 듯하네.’
하였다.”
허생후지(許生後識)Ⅱ
나의 나이가 20살(1756년) 되었을 때 봉원사(奉元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떤 손님 하나가 음식을 적게 먹으며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선인(仙人) 되는 법을 익혔다. 그는 정오가 되면 반드시 벽을 기대어 앉아서 약간 눈을 감은 채 용호교(龍虎交)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자못 늙었으므로 나는 존경하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허생의 이야기와 염시도(廉時道)ㆍ배시황(裵是晃)ㆍ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잇달아 몇 만언(萬言)으로써 며칠 밤을 걸쳐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거짓스럽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휼황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모두 들음직하였다. 그때 그는 스스로 성명을 소개하기를 윤영(尹映)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병자년(1756년) 겨울이다. 그 뒤 계사년(1773년) 봄에 서쪽으로 구경갔다가 비류강(沸流江)에서 배를 타고서 십이봉(十二峯) 밑까지 이르자, 조그마한 초암 하나가 있었다. 윤영이 홀로 중 한 사람과 이 초암에 붙여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기뻐하면서 서로 위안의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열여덟 해를 지났지마는 그의 얼굴은 더 늙지 않았다. 나이 응당 팔십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나는 그에게,
“허생 이야기 말입니다. 그 중 한두 가지 모순(矛盾)되는 점이 있더군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곧 풀이해 주는데 역력히 그저께 겪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자네, 지난날 창려(昌黎)의 글을 읽더니 의당….”
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자네, 일찍이 허생을 위해서 전(傳)을 쓰려더니 이젠 글이 벌써 이룩되었겠지.”
하기에, 나는 아직 짓지 못했음을 사과하였다. 이야기 할 때 나는,
“윤 노인(尹老人).”
하고 불렀더니, 노인은,
“내 성은 신(辛)이요, 윤이 아니거든. 자네 아마 잘못 안 것일세.”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는,
“내 이름은 색(嗇)이라우.”
한다. 나는,
“영감님의 옛 성명은 윤영이 아닙니까. 이제 갑자기 고쳐서 신색이라니 무슨 까닭이십니까.”
하고 따졌더니,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자네가 잘못 알고서 남더러 성명을 고쳤다구.”
한다. 나는 다시 따지려 했으나 노인은 더욱 노하여 파란 눈동자가 번뜩일 뿐이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 노인이 이상한 도술을 지닌 분임을 알았다. 그는 혹시 폐족(廢族)이나 또는 좌도(左道)ㆍ이단(異端)으로서 남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는 무리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문을 닫고 떠날 무렵에도 노인은,
“허생의 아내 말씀이요, 참 가엾더군요. 그는 마침내 다시 주릴 거요.”
하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또 광주(廣州)신일사(神一寺)에 한 노인이 있어서 호를 삿갓 이생원이라 하는데 나이는 아흔 살이 넘었으나 힘은 범을 껴잡았으며, 바둑과 장기까지도 잘 두고 가끔 우리나라 옛 일을 이야기할 제 언론이 풍부하여 바람이 불어 오는 듯했다. 남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나이와 얼굴 생김을 듣고 보니 윤영(尹映)과 흡사하기에 내가 그를 한번 만나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물론 이름을 숨기고 깊이 몸을 간직하여 속세를 유희(遊戲)하는 자가 없지 않은즉 어찌 이 허생에게만 의심할까보냐. 평계(平谿) 국화 밑에서 조금 마신 뒤에 붓을 잡아 쓴다. 연암(燕巖)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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