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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초한지 卷二 / 2장 江東에서 이는 구름(2)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019. 1. 2. 11:53
회계(會稽) 군수 은통(殷通)이 보낸 젊은 교위(校尉) 하나가 요란한 말 발굽소리와 함께 항량의 저택으로 달려온 것은 손씨녀와 함께 아침상을 받은 항량이 막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안마당까지 말을 달려 들어온 교위는 가동(家싔)에게 말고삐를 맡기기 바쁘게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는 게 벌써 예사롭지 않았다.
“이렇게 일찍 왠 일이시오?”
“군수께서 대협(大俠)을 찾으십니다.”
“나를 부르는 일이라면 다리 실한 군졸 하나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런데 무슨 큰 일이 있기에 교위께서 몸소 달려오셨소?”
“저는 모릅니다. 가서 군수님을 뵙고 직접 듣도록 하십시오.”
항량이 거듭 물어도 젊은 교위는 굳어있는 얼굴로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주무(朱武)라고 하는 그 교위는 하남 영양(潁陽)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회계군에 와서 벼슬을 살고 있었다. 그는 항량의 사람이라고까지는 할 수는 없어도, 항량이 군아(郡衙)를 드나들면서 공들여 사귀어 둔 군리(群吏)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도 알던 정 보던 정 없이 나오자 항량은 더욱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슬며시 그에게 평소의 친분을 상기시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주(朱)교위.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에 있소?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시오. 그래도 대강은 알아야 나도 알맞은 채비를 할 수 있을 것 아니오?”
그제야 젊은 교위도 항량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는 듯 조금 풀린 얼굴이 되어 하소연하듯 말했다.
“말도 마십쇼. 요즘 저희 군수님은 표정 없기로 이름난 예전의 그분이 아닙니다. 아침저녁 변덕이 죽 끓듯 하시지요. 어제 그제는 본부 병마를 모두 풀어 군계(郡界)를 철통같이 지키라 하더니, 오늘은 또 모조리 오중(吳中·吳縣. 회계군의 治所로 지금의 蘇州市)으로 불러들이란 분부십니다. 뿐입니까, 속현(屬縣)마다 사람을 보내 병마를 긁어모으는 한편 큰 농성전(籠城戰)이라도 치를 듯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대택(大澤)의 반도(叛徒)들이 밀고 든다는 기별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것들을 쳐 없애라고 조정의 칙사가 온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대협을 부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어서 모셔 오라고 성화이십니다만 무엇 때문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항량도 조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 의뭉스런 물건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저도 가만히 앉아서 한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을 테지. 그런데 - 무얼까? 이토록 급하게 나를 불러 무엇을 하려는 걸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받았다.
“알겠소. 내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 부중(府中)으로 돌아가 그렇게 일러주시오.”
“아니 됩니다. 기다리더라도 대협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위가 다시 굳은 얼굴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인가 은통에게 적지 아니 시달리다 온 것 같았다.
“그럼 잠깐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그때가지만 뜰에서 기다려 주시오.”
항량은 그렇게 말하고 안채로 들어가며 가까이 있던 노복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시켰다.
“말에 안장을 얹고 나갈 채비를 하라. 그리고 작은 주인에게 얼른 내방으로 들라 이르라.”
항량이 내실로 들어가자 손씨녀가 뒤따라 와서 옷걸이며 벽장에 갈무리해 두었던 나들이옷을 꺼내 왔다. 간밤 잠자리를 함께 한데다 조금전의 아침상까지 함께 받은 터라 다시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곁에서 옷 입는 것을 거들며 그녀가 가만히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무슨 일로 사람을 이리 급히 찾는지요.....”
하지만 그때 이미 항량은 골똘한 헤아림에 젖어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항량이 만일 알아들었다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엄한 눈길로 꾸짖음을 대신했을 물음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大澤鄕)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벌써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처음 그 소식이 오중(吳中)에 전해졌을 때만 해도 항량은 좀 어리둥절했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 태자 부소(扶蘇)와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을 가장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 태자가 진나라를 향해 칼을 뽑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진나라에 몰려 자결한 아버지 항연과 손을 잡고 일어났다는 데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항연이 실은 죽은 게 아니라 숨어살면서 초나라를 되살리려하고 있다는 풍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막을 잘 모르는 백성들 사이의 일이었고, 바로 그 항연의 아들 되는 항량에게는 그저 가슴아픈 헛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을 품고 자결한 아버지가 원수인 진나라의 태자와 어울려 군사를 일으켰다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 진승과 오광이 누군지가 드러난 뒤에도 항량이 느낀 황당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의 세상을 뒤엎고 초나라[장초]를 되일으킨 것이 초나라의 왕족이나 명문거족에서 난 지사(志士)가 아니라, 양성(陽城)과 양하(陽夏)의 두 무지렁뱅이 농군이라는 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훈련도 받지 못하고 무기도 없는 변방의 수졸(戍卒) 몇백을 이끌고 패배를 모르던 진나라의 관군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있다는 소문은 다만 오래 억압받고 살아온 백성들이 진나라에 앙갚음하듯 꾸며댄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런데도 진승과 오광은 승승장구하고, 옛 육국 왕실의 혈통과 그 명문가의 후손들은 다투어 진승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찾아 들었다. 특히 제나라의 공자 전담(田y)이나 위나라의 공자 구(咎)까지도 그 밑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은 항량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래 쫓기면서 세상을 떠돌아 그 변화의 기미에 밝은 맏형 항백(項伯)을 다시 하비(下뾄)로 보내어 그곳에서 머지 않은 진(陳)땅의 형세를 알아보게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에 짚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바로 그 ‘때’일지도 모른다.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영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를 잘 탄 사람이 영웅이고, 진승과 오광은 그런 뜻에서 참된 영웅일수도 있다.....)
그러자 항량은 갑자기 조급해졌다. 그 동안 오중 땅에 숨어 사람들을 사귀고, 그들을 엮어 은밀히 세력으로 키워온 것은 바로 그러한 때를 기다림이 아니었던가. 그때가 오면 떨쳐 일어나 망해버린 나라와 집안을 되살리리라는 비원(悲願)이 바로 그의 삶에 긴장과 활력을 지탱시켜주는 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항량이 그 동안 기른 세력을 끌어 모아 몸을 일으켜보려 하면 천근의 무게로 항량을 짓누르는 게 있었다. 바로 회계수(會稽守) 은통의 존재였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킨 뒤로 천하 서른 여섯 군(郡)의 태반은 봉기(蜂起)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관동(關東)에서도 하남(河南)과 강동(江東) 일대의 옛 진(晋)초(楚) 땅의 군현(郡縣)이 특히 심했다. 왕족이나 명문가의 후예와 백성들이 저마다 들고일어나 군수와 현령을 죽이고 진승과 오광의 거병(擧兵)에 호응하였다.
초나라를 없애고 만든 세 군 가운데 하나인 회계군(會稽郡)도 위치로 보아서는 평온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군수 은통은 산악 같은 침착과 의연함으로 벌써 두 달이 넘도록 회계군을 봉기의 회오리에서 지켜오고 있었다. 그 비결은 군기(軍紀)와 민심의 장악이었다.
평소 은통은 엄격하면서도 세심하게 군사(軍事)를 보살폈다. 그 덕분에 진나라 조정이 보낸 수비대뿐만 아니라 지역 현군(縣軍)까지도 흔들림 없이 은통의 명에 따랐다. 거기다가 군정(郡政)에서 항량 같은 그 지방의 명망가를 활용해온 것도 민심을 잡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중재자를 내세워 진나라의 폭정을 동의에 바탕한 다스림처럼 얼버무림으로써 그만큼 백성들의 원한을 적게 산 까닭이었다.
그런 은통이 진승과 오광에게서 비롯된 회오리에 대응하는 방식은 부동(不動)의 원리였다. 일이란 어떻게든 풀려가기 마련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지막 결말의 순간을 기다리겠다, 그때 대세를 올라타 가장 작은 힘을 들여 가장 큰 것을 얻겠다 -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꼼짝 않고 군아(郡衙)에 틀어박혀 세상 돌아가는 것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되자 항량은 아무리 다급해도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섣불리 일을 벌였다가 은통이 그때까지 전혀 손상받지 않고 유지해온 관병(官兵)으로 거세게 반격이라도 해오는 날이면, 그 뒤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이제 네가 움직인단 말이지. 드디어 어느 쪽이 쓰러지고 어느 쪽이 남을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지….)
항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날 따라 유달리 정성 들여 갖춰 입은 겉옷에 마지막 띠를 둘렀다. 거창하게 겉옷까지 갖춘 까닭은 속옷 안에 걸친 엄심갑(掩心甲·가슴을 보호하는 철갑)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때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등뒤에서 우렁우렁한 항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아버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렇다. 나와 함께 군아에 가봐야겠다. 은통이 찾고 있다는구나”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 조카의 눈이 화경(火鏡)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격앙되거나 고양(高揚)되었을 때 내뿜는 눈빛이었다. 항량은 문득 그 전해 봄 절강(浙江)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렸다.
그해 순수(巡狩)에서 회계산을 돌아본 시황제가 절강을 건널 때였다. 항량과 항우도 그런 시황제의 화려한 순수 행렬을 보기 위해 강가로 나갔다. 엄청나게 큰 용선(龍船)이 온량거(쟆>車)를 싣기 위해 물가에 닿자 시황제가 잠시 온량거의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병색이 완연했으나, 아직도 그 얼굴에는 바라보는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항우에게는 느낌이 달랐던 듯했다. 꼭 지금과 같은 눈빛으로 시황제를 쏘아보다가 옆 사람이 다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것(또는 저 사람의 자리)이라면 빼앗아 대신 차지할 만하구나(彼可取而代也)!“
그때 항량은 놀라 그의 입을 막으며 나무랐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자칫하면 삼족(三族)이 모조리 죽게된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없어 별일이 없었지만, 그날은 어지간한 항량도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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