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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초한지 卷一/ 3장 劉哥네 막내(3)
    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019. 1. 1. 12:29


    유계(劉季)가 태평스레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동안에도 나머지 두 사람은 부지런히 돌 깨는 일을 했다. 마치 유계의 몫까지 해놓겠다는 듯이나 열심이었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진나라 병사가 돌아오면서 일이 터졌다.


    “뭔가? 거기 앉아 있는 저 벗겨 놓은 삼대 같은 놈은.”


    일꾼들을 몰아대고 다잡는 게 제 일인 그 병사는 바위 위에 태연히 걸터앉아 쉬고 있는 유계를 보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채찍으로 써오던 밧줄을 단단히 감아쥐며 유계에게로 달려왔다.

    여느 일꾼이라면 사납기로 이름난 진나라 병사가, 그것도 표독스럽고 잔인하기까지 한 노역장 감시병이 성난 얼굴로 달려오는데 겁부터 먹었을 것이다. 유계에게도 어쩌면 고약하게 되었다는 느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답답할 만큼 느렸다. 얼른 바위에서 내려와 일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못하고, 여전히 바위에 앉은 채 야릇한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저 초(楚)나라 원숭이 놈이.”


    성마른 진나라 병사가 더 참지 못하고 채찍부터 날렸다. 그때 정을 들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날아오는 채찍을 잡았다.


    그는 성이 노(盧)요 이름은 관(쇿)이라 하였는데 유계와 같이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이었다. 태공과 한마을에 살며 남달리 친했던 그의 아버지는 기이하게도 태공이 유계를 얻은 것과 같은 날 같은 시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여기며 술과 양고기를 가지고 와서 두 집의 경사를 축하해 주었다.


    노관은 유계와 함께 자라며 글도 같이 배우고 놀기도 함께 했다. 하지만 동갑내기인데도 어렸을 때부터 벌써 유계를 형이나 손윗사람 떠받들 듯하는 게 이미 여느 동무 사이는 아니었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의 비유처럼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유계란 사내를 따라 천하를 휩쓸고 왕후[연왕 장안후]가 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될 운명을 그는 그때 이미 예감했던 것일까.


    나중에 다 자란 유계가 중양리를 벗어나자 노관도 그를 따라나섰다. 함께 가까운 풍읍을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패현 성안으로 옮겨가 그 저잣거리를 헤맸다.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武氏) 아주머니 술집에 들러 외상술을 얻어 마실 때도 유계와 함께했다.


    하지만 노관이 유계와 함께하는 것은 벗으로서 동행보다는 졸개로서 수행이나 호위에 가까웠다. 언제나 유계로부터 한 발자국쯤 떨어져서 걸으며 때맞춰 시중을 들었고, 사방을 살펴 가릴 것을 가리고 피해야 할 것을 피했다. 그러다가 궂은일이나 위태로운 때를 만나면 스스로 유계를 대신해 나서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유계의 신화(神話)가 중양리나 풍읍뿐만 아니라 패현 성내에까지 두루 알려지게 된 것도 많은 부분 노관의 과장과 전파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계의 얼굴이 용을 닮았다고 하지만 누가 용을 보았는가. 그래서 얼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서슴없이 유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라. 저 얼굴이 바로 용의 얼굴이다!”


    유계가 용을 닮은 것이 아니라 용이란 모름지기 유계와 같이 생겨야 한다는 말 같았다.


    유계의 왼쪽 허벅지에 나 있다는 일흔 두개의 점도 그렇다. 어떤 것까지 점으로 치느냐에 따라 그 수는 일흔보다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다. 여름날 유계가 겉옷을 걷어붙이고 앉으면 할 일 없는 건달들이 그 곁에 붙어 헤아려보지만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노관이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일흔 두 개다! 일년 360 일을 다섯[五行]으로 나눈 바로 그 숫자다.”


    유계가 잠잘 때 어른거린다는 용의 이야기도 노관의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 유계의 특이한 용모와 술 취해 잠들었을 때의 별난 몸짓이 어우러져 우연히 만들어낸 순간적인 인상을 노관이 과장하여 퍼뜨린 것은 아닌지.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런 노관에게 넘어가 자신들은 믿지도 않는 소문을 더욱 그럴싸하게 윤색한 것은 아닌지.


    유계가 외상술을 먹는 날은 술집의 매상이 평소보다 몇 배나 올랐다는 말이 나게 한 것도 노관의 솜씨였을 것이다. 유계가 마시는 동안 슬며시 패현 저잣거리로 나간 그는 평소 그들을 따르는 건달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으리라. 그리고 그들을 몰고 와서 퍼마시게 함으로써 유계의 외상술 때문에 나빠진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 아주머니의 기분을 풀어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언젠가 한번은 유계가 무언가 죄를 저질러 숲 속에 숨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미 유계는 패현 유협(遊俠)세계의 우두머리처럼 되어 따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생스러운 도망길이어선지 아무도 함께 가주지 않았다. 오직 노관만이 그를 따라가 죄가 풀릴 때까지 정성을 다해 섬기고 보살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유계에게는 싫어도 함양으로 부역을 나와야 할 까닭이 있었지만, 노관은 순전히 유계를 따라나섰다. 전처럼 그를 보살피고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유계가 함양으로 부역을 나오게 된 경위는 이랬다.


    비록 한 푼 없는 건달로 패현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품은 뜻이 커서인지 유계의 눈은 턱없이 높았다. 현청(縣廳)에서 일하는 구실아치[吏屬]들이나 아전바치[胥吏]들뿐만 아니라 진(秦)조정에서 내려보낸 현령까지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시간이 나면 관아를 어슬렁거리며 그래도 배짱이 맞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현령은 그런 유계를 싫어했지만 관원들 중에는 패현 저잣거리의 건달들 못지않게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청의 마구간에서 막일을 하다가 낮은 아전바치로 일하게 된 하후영(夏候쒚)이란 젊은이도 그랬다. 뒷날 한(漢)제국에서 여음후(汝陰侯)에까지 오를 운명이 어떤 예감으로 작용한 것인지, 그 또한 유계라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나올 만큼 우러르며 따랐다.


    그런데 한 달포 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유계가 칼을 차고 현청에 놀러와 하후영을 만나서도 칼과 검술이 주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얘기 끝에 새로 익힌 검술을 장난처럼 펼쳐 보이다가 유계가 휘두른 칼에 하후영이 그만 크게 다치고 말았다.


    아전바치도 관리라 현령은 자신이 부리는 하후영이 칼에 베였다는 말을 듣자 몹시 화를 냈다. 하후영을 끌어오게 해 범인을 캐묻는 한편 전부터 유계와 가깝게 지내온 옥리(獄吏) 조참(曹參)을 불러 얼른 범인을 찾아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다행히 하후영이 굳게 입을 다물어 누가 그랬는지 바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본 사람이 있어 조만간에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애가 타게 된 것은 옥리 조참뿐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유계를 흠모해온 패현의 공조리(功曹吏) 소하(蕭何)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유계를 도울 길이 없을까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마침 날아든 것이 난지(蘭池)를 파기 위한 일꾼을 함양으로 뽑아 보내라는 공문이었다. 그걸 본 소하가 가만히 유계에게 권했다.


    “유형(劉兄). 패현 역도(役徒〓노역인부)들의 도두(徒頭〓인부 우두머리)로 세워드릴 테니 잠시 피하는 셈치고 함양에나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몸이야 고단하시겠지만 그것만이 이번 어려움을 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설령 하후영이 못 견뎌내고 바로 털어놓는다 해도 이미 멀리 부역 나간 사람을 어찌하겠습니까? 추위가 오기 전에 공사가 끝난다 하니 넉넉잡아 몇 달만 참으시면 될 것입니다. 만일 공사가 끝나지 않는다 해도 내 반드시 교대(交代)를 보내 유형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유계도 뾰족한 수가 없어 소하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함양으로 떠나게 되자 제일 먼저 노관이 따라나섰다. 제 차례도 아닌데 소하에게 청을 넣어 남이 모두 싫다하는 부역 길에 오른 것이었다.


    “어엇, 이 작은 원숭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노관에게 채찍을 붙잡힌 진나라 병사가 목덜미가 시뻘게지며 소리쳤다. 금세라도 허리에 차고 있는 청동 장검을 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때 망치를 휘두르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산악처럼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한번만 봐주쇼. 우리 형님이 편찮으셔서 잠시 앉아 쉬시게 한 것이오. 게다가 형님은 우리들의 도두(徒頭)외다.”


    그러는 사내는 성이 번(樊)씨요 이름을 쾌(칗)라 하였다. 역시 패현 사람으로 힘이 장사이고 다른 무예에도 밝은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번쾌는 성안에서 개백정[犬屠殺]을 업으로 삼았으나 본시 천민은 아니었다. 육국(六國)이 차례로 망해가는 혼란의 시대에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패현 저잣거리에 숨어 살게 된 명가(名家)의 후예였다고 한다.


    유계보다 몇 살 어린 번쾌는 패현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유계를 진작부터 형님으로 모셔왔다. 하지만 그 지방에 남아있는 전설로 미루어 그들의 만남이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맺어진 그런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도 패현 인근에서는 개고기를 손으로 찢어먹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빈털터리 건달 시절의 한고조(漢高祖) 유계에게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깊이 사귀기 전 돈도 내지 않고 개고기를 썰어 먹어대는 유계가 밉살맞아 번쾌가 칼을 감춰버리자 유계는 손으로 찢어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구경하는 건달들에게는 또 멋으로 보여 그 다음에는 모든 건달들이 손으로 개고기를 찢어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번쾌는 곧 유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스스로 아우 되기를 청하며 그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계가 패현에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맨 먼저 달려나가 노관과 함께 좌우에 갈라 섰다. 그때부터는 누구보다 충실한 유계의 주먹이었다. 실제로 번쾌는 틈만 나면 바위 같은 주먹을 흔들면서 세상을 향해 을러댔다.


    “누구든 우리 형님을 건드리면 그 구족(九族)을 찾아 모조리 가루를 내어놓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번쾌는 먼저 하후영을 다치게 한 사람이 유계란 것을 아는 자들을 주먹으로 겁을 주어 입부터 막았다. 그러다가 유계가 끝내 함양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 번쾌는 두말 없이 개백정질을 거두고 따라나섰다. 노관이 따라간다고 하지만 그는 노관의 보잘것없는 완력과 지나친 약삭빠름을 아울러 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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