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maninov, Sergei 1873-1943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피아노 협주곡 2번 다 단조 작품 18
Moscow Philharmoy Orchestra.
Cond :Kyrill Kondrashin / Piano :Vladimir Ashkenazy,

귀족 출신인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스위스로 망명했다.
후에 미국에 정착했으나 조국 복귀에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실현되지 못한 채 비버리힐즈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이 곡만큼 영화에 자주 사용되는 클래식음악도 없다.
특히 명화에 자주 등장했다.
이 곡이 갖고 있는 로맨틱하고 화려한 분위기가 잘 어울렸던 것이다.
이 음악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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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천재라고 불릴만한 인물들조차 비평가가 함부로 내뱉는 말에는
의외로 약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라흐마니노프도 그 좋은 본본기라고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어릴 적부터 양친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유아과정부터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아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이미 재학 중에 완성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3년 뒤에 쓴 ‘교향곡 제1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갖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미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걸작을 포함한
‘환상적 소품집’이나 음악원의 졸업 작품으로 쓴 오페라 ‘알레코’가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볼쇼이 극장에서 발표되어 명성을 얻고 있었던 그였다.
그럼에도 비평가들의 악평에 극도의 실망과 낙담에 빠져
한 때는 작곡을 포기하고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길을 꿈꾸게 된다.
영국에서 초대되어 연주가로 여행을 한 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다시 작곡을 시도해보지만, 2년 전에 받았던 비평가의 칼날이 무서워
차차 신경쇠약에 빠지고, 급기야는 정신과 의사의 신세를 졌다.
이때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한 다르 박사는 비범한 명의였는데,
2년 뒤에 그는 다시 건강한 정신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완성한 것이 바로 이 피아노 협주곡으로,
이 곡의 성공으로 그의 지위는 완전히 부동의 것이 되었고,
이후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도 그 모양이니,
신출내기 범재가 비평가의 부주의한 한 줄의 글로
숨통이 끊어지는 일이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하기야‘ 범재’라는 존재는 아예 그런 ‘델리키트'한 심성조차
갖고 있지 못한 게 보통이기도 하지만
남을 평가한다는 일에
함부로 나서거나 가볍게 휘둘러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은
비록 예술의 평론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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