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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제26대 고종 - (1)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5. 9. 17:53


    
    ■ 제26대 고종 
    
    ■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
    
    서기 1863년 12월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철종은 14년 간 재위에 있었지만 강화도령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재위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그가 아니라 '도령'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외척 안동 김씨였다. 
    그런데 철종이 서른셋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자리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대체적인 예상은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강화도령 같은 한미한 종친을 내세워 후사로 삼으리라는 것이었으나, 
    안동 김씨는 철종의 급서를 예상하지  못한 듯 준비된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왕실의 웃어른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조씨였다. 
    조씨는 중희당에 중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일을  당하니 원통하지만 이제 국세의 안위를 살펴볼  때 
    시각이 급하니 여러 대신들은 종사의 대계를 빨리 의정하라."
    "종사의 대계"란 후임 임금을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종사의 대계를 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도정치라지만 신하의 입으로 누가 임금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가는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신정왕후 조씨만이 거론할 수 있었다. 
    안동 김씨는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원로인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나서 "자성(신정왕후)이 교지를 내리셔서 책봉하시기를 이뢰었고
    드디어 안동 김씨를 누르고 친정 풍양 조씨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 흥선군의 아들 명복
    
    "그렇다면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이 전교는 조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 결탁한 결과였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란 말에 안동 김씨는 놀랐으나 안된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드디어 흥선군이 조선 역사상 처음 살아 있는 임금의 생부로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나 인조의 아버지 능양대원군,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처럼 
    사후에 추존된 예는 있으나, 생전에 아들이 임금이 되어 대원군이 된 예는 없었다.
    독일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잘 알려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후사였으나, 이는 양자로 들어간 때문이고 실제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세손 
    병원의 아들이었다.
    즉위 당시 고종은 열두 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조씨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왕대비 조씨가 섭정을 양보함으로써  드디어 안동 김씨에게 '궁도령'이라고 무시당하던 
    몰락 왕족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앞에 놓인 과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대내적으로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나라 구석구석에 끼친 폐해를 타파하고 정상적인 왕조 통치체제를 
    회복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밀려오는 서양과 일본 세력에 맞서 국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한마디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는데 여기에서 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주역인 안동 김씨를 제거하고 그간 왕권을 견제해오던 비변사를  
    축소, 폐지했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원성의 표적이었던 
    서원을 철폐해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고종 3년(1866)프랑스 선교사 처형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고, 고종 8년(1871)에는 제너럴 셔먼 호 소각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략한 
    미국함대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당시 조선 왕조가 처한 사황은 왕권강화라는 한 가지 목표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원납전을 주조하는 등 
    수많은 무리수를 두어 백성들의 지지를 원성으로 돌렸으며,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원군의  가장 큰 실수는 민씨를 며느리로 
    뽑은 것이었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해 부인 민씨의  친정에서 며느리를 뽑았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왕비가 된 명성왕후 민씨는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인 면암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10년 치세를 실정의 연속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해 대원군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를 놓고 대원군과 최익현이 맞붙었을 때, 고종은  훗날 여러 번 반복해 
    보여지는 전형적인 방관과 기습의 태도를 취했다.10년동안 대원군의 정치에 
    수수방관 끌려가기만 했던 고종은, 일단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대원군을 버리고 그를 지지하면서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고종은 대원군측이 격렬히 반발하는 와중에 최익현이 대원군의 
    국정 간여 금지를 주장하는 2차 상소를 올리자, 할 수 없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긴 했으나, 이는 최익현이 백성들로부터 '최충신'이란 찬양을 받아가며 
    귀양길에 올랐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대원군측의 공격으로부터 최익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후 
    양주군 직곡산장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위 10년(1873) 11월,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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