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평(蕩平)정국- I
조선시대 궁궐에서 근무한 여자들 중 실제 궁궐 살림을 책임졌던 상궁 이하
실무자들의 품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궁,상의(정5품)⇒상복,상식(종5품)⇒상침,상공(정6품)⇒상정,상기(종6품)⇒
전빈,전의,전선(정7품)⇒전설,전제,전언(종7품)⇒전찬,전식,전약(정8품)⇒
전등,전채,전정(종8품)⇒주궁,주상,주각(정9품)⇒주변치,주치,주우,주변궁(종9품)
위에서 나열한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오늘날로 볼 때 행정서기보․전기주사…
등등에 해당하는 직류․직급별 분류라 할 것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종5품 이하의 궁인직
여인을 말한다. 그러다가 대체로 35∼36년쯤 근무하면 정5품을 제수 받게 되어
이때부터는 ‘상궁’이라 불리었다.
그렇다면, 『무수리』는 어떤 일을 맡은 여인이었을까.
각 처소에서 물 긷기, 불 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 나인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통칭하여
무수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대부분이 기혼자로서, 가슴에 패(牌-출입증)를 달고
주로 궁 밖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궁녀가 정규공무원이었다면 무수리는 이를테면
잡급직 혹은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조 21대 왕 영조는 바로 이런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재임 중 3명의 왕비(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두었으나
슬하에 아들은 한 명도 두지 못했다. 정작 그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주인공들은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등 이른바 ‘창밖의 여자’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경종을 낳은 여인이 장희빈이요, 영조를 낳은 여인이 무수리 최씨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씨는 결혼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경종과 영조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자식들이었다는 얘긴데, 요즘 같으면 만사 재치고 가정법원부터
직행하였을 중차대한 가정파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궐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잔치까지 성대히 벌어졌을 터이니,
세상 참 불공평(?)하단 말밖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각설하고, 영조에게는 이처럼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즉위 초기엔 일부 반대파 - 특히 소론 강경파 - 에서 그를 임금으로
간주하지 않는 행태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임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야 말로 이를 불식시키는 첩경임을 직시하고 평생 근신하는 자세로
국태민안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짐으로써 조선의 발전을 크게 앞당긴
입지전적인 임금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즉위와 함께 영조가 내지른 제일성은 ‘탕평책(蕩平之策)’이었다.
기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붕당의 폐해가 누구보다 뼛골 깊숙이 와 닿았을 것이었다.
영조는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었던 소론의 이광좌․조태억을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세제 책봉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조정의 기강을 다잡는 차원에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만들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 첫 번째 타켓은 뭐니뭐니 해도 ‘7인의 특공대’중 대장 격이었던 김일경이었다.
때마침 노론 송재후로부터 신임사화 조사결과서(교문)에 연잉군 시절의 영조를 음해
(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하는 문건이 있으므로 김일경을 단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 이후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처에서 빗발쳤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심문)하였으나, 영조에게 ‘나으리…’ 운운 하며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는 방자함으로 일관하던 김일경은 끝내
공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처형되었다.
또한 노론 역모설을 고변하여 신임옥사의 또 다른 단초를 제공하였던 목호룡도
친히 국문하였으나 같은 행태를 보임에 따라 당고개에서 목을 자른 후 3일간 거리에
매달아놓는 참형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하였던 나머지 6명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의 왕세제 시절 소론이 저지른 행위들이 모함으로 속속 드러나고 공작정치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기를 편 노론이 다시 벌떼처럼 소론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영조는 이광좌, 조태역, 유봉휘 등 소론 핵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 노론측 인사들로 진용을 다시 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아울러 노론의 4대신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임옥사를 ‘거짓으로 죄를 꾸민 것’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신원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과천에 노론 4대신을 기리는 사충서원도 세웠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하지만 노론 측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조를 압박하였다.
이를테면 즉위를 도와준 자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으라는 ‘빚 독촉’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지지세력이 아니라 반 공갈․협박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특히 민진원, 정호 등이 주동이 되어 신임옥사에 대한 보복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국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였던 영조로서는 소론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이 같은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론은 ‘얼음과 숯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 (빙탄불상용)’는 논리를 내세우며 차제에 소론과 노론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다시 압박하고 나왔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정국이
다시 정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전가의 보도 같은 ‘판엎기(환국)’를 통해 이를 타개하였다.
민진원, 정호 등 노론 대신들을 전격 파면시켜버리고 그 자리에 얼마 전 몰아냈던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을 다시 기용하는 한편 소론세력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그리고 경종 연간에 있었던 세제책봉 상소 건과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 상소 건 등을
모두 불충(不忠)한 행위로 규정하였다. 하여, 을사처분에 의하여 ‘사충(四忠)’으로
신원되었던 노론의 4대신은 졸지에 ‘사역(四(逆)’으로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뜻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났다.
한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과격세력이 경종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의 교체를 기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름하여 ‘이인좌의 난’이었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주군을 잃은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일부 소론 과격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의 급진세력을 포섭하여 영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설의혹이 있으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모반를 정당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박필현 등은 영조 즉위 직후부터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지방의 유력인물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양과 지방에 속속 조직이 만들어졌고 지역별 대표도
선임해놓았다. 아울러 평안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도
구어 삶아 놓았다. 이윽고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의 동생 심유현의 말
("주상께선 승하하시기 전 검은 피를 쏟으셨다"는 말)을 빌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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