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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호의 난(牧胡-亂)
    옛 이야기/한국사의 亂 2019. 4. 23. 14:58


      
      ■ 목호의 난(牧胡-亂)  
      
      ■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에 당시 원(元)의 목장이 있던 제주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자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난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갑인의 변(甲寅-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배경
      삼별초에 의한 대몽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원종(元宗) 14년(1273년) 이후, 
      원은 삼별초가 점거했던 탐라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에는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하고 목장을 설치하였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그대로 원 조정의 목장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역할을 맡은 자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다.
      목호의 숫자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 년 동안을 제주도에 
      주둔하며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탐라 여인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했고, 한편으로 탐라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부패에 대한 탐라 주민들의 반발심을 교묘히 선동하여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기도 했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이 북쪽으로 밀려난 뒤 고려와 새롭게 수교한 명(明)은 고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당(북원)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濟州馬) 2천 필을 
      고려에서 징발해 바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제주 목호의 지도자였던 하치(哈赤) 석질리필사 · 초고독불화 ·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우리가 어찌,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적국인 
      명에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라며 350필만 내어주었고, 명의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은 마침내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 경과
      조정에서 탐라 토벌을 위해 편성된 각 군대의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양광전라경상도통사: 최영(당시 문하찬성사) 도병마사: 염흥방(당시 밀직제학)
      양광도원수: 이희필(상원수, 당시 삼사좌사), 변안열(부원수, 당시 판밀직사사)
      전라도원수: 목인길(상원수, 당시 찬성사), 임견미(부원수, 당시 밀직)
      경상도원수: 지윤(상원수, 당시 판숭경부사), 나세(부원수, 당시 동지밀직사사)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도순문사: 김유(당시 지문하사)
      동원된 전함은 모두 314척이었고(왜구로부터 빼앗은 배) 군사는 총 25,605명이었다.
      여기에 문하평리 류연과 지밀직사사 홍사우를 각각 양광도와 전라도의 도순문사로 삼아 
      머물러 지키면서 불의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의 토벌군은 8월에 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에 다다라서 
      군사들의 규율을 정했는데, 바람이 좋지 않은 데다 서해도순문사 김유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산곶에서 더 머무르려는 최영의 명을 어기고 다른 장수들은 보길도에서 
      먼저 배를 띄웠고 최영도 어쩔 수 없이 출발하였으며, 추자도(楸子島)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대부분의 함대가 크게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명월포(明月浦) 바닷가에 도착한 고려군은 전임 제주목사 박윤청을 보내 탐라의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를 회유하는 한편 목호들에게도 자진 항복을 요구하면서 
      배 11척에 타고 있던 고려군을 먼저 상륙시켰지만, 이들은 명월포에 포진해 있던 
      목호의 3천 기병에게 몰살당하고, 앞서 탐라에 와있던 고려의 안무사(按撫使) 이하생도 
      목호의 손에 살해되었다. 목호의 기세뿐 아니라 탐라 주민 모두가 목호와 결탁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군사들은 더 진군하지 않으려 했고, 최영이 비장 한 명을 
      여러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보이자 그제서야 해안에 상륙해 목호와 전투를 치렀다.
      30리까지 추격해 들어간 고려군은 목호들의 말을 모두 빼앗아 기병대를 갖추었다.
      목호 지도자인 석질리필사 등은 고려군을 새별오름으로 유인해 결판을 내려했으나,
      이를 간파한 최영은 군사를 몰아 급히 추격했고 수세에 몰린 목호들은 서귀포(西歸浦) 
      남쪽의 범섬으로 달아났다.
      최영은 빠른 배 40척을 모아 섬을 포위하게 한 뒤 정병을 거느리고 범섬으로 들어갔고,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그의 세 아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고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을 모두 처형하는 것은 물론, 
      벼랑에서 자결한 나머지 두 목호 지도자의 시신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수급은 개경의 왕에게 보내졌다).
      이 전투에서 최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달아난 답실만이나 조장홀고손 등 105인은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서 동도(東道) 아막을 거점으로 농성하였으나 
      최영은 이마저도 격파하였다.
      목호들을 쳐부수고 거둔 전리품 가운데 말 1천 필은 현지 관인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고 
      금패와 은패, 인신은 제주의 고려 관원과 탐라의 토착 지도자들에게 나눠주었다.
      ● 영향
      최영이 목호를 정벌하러 간 사이에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명의 사신은 
      3백 필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개주참에서 호송을 맡았던 고려의 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를 한참 동안 험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명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禑王)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남쪽(제주)으로
      정벌하러 나가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한사코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고,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위화도 회군)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서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함으로서 그때까지 반은 고려, 
      반은 몽골에 귀속되어 있던 제주는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고, 
      제주는 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2년(1420년)까지 제주목의 
      판관을 지냈던 하담(河澹)은 목호의 난을 가리켜 우리 동족도 
      아닌 것이 섞여서 갑인의 변(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덮었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고 하여 치열했던 전란의 모습을 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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