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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연년의 난(李延年 ― 亂)
    옛 이야기/한국사의 亂 2019. 4. 12. 10:59


      
      ■ 이연년의 난(李延年 ― 亂)
      
      ■ 고려시대 최씨 무인집권기 때에 이연년 형제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란.
      1232년(고종 19) 이연년은 아우와 함께 원율·담양 등지에서 무리를 모아 
      백제부흥을 표방하며 민란을 주도했다.
      이연년 자신은 백적도원수라 자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민란의 명분을 
      '백제부흥'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백제도원수로 지칭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해양 등의 일대를 점령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1237년 나주성에 주둔한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에 의해 곧 진압되었다.
      ■ 이연년(李延年?∼1237(고종 24). 고려 최우정권 시기 민란 주동자.
      본관은 원율(原栗: 전라남도 담양). 1237년 원율·담양(潭陽)의 이연년 형제는 
      산림(山林)의 무리들을 끌어모아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를 자칭하고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 등지의 주·군(州郡)을 점령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연년 형제가 중심이 된 민의 저항은 몽골의 3차 침입(고종 22∼26, 1235∼1239) 이후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시기에 일어났던 점에서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내륙 지역의 피해와 질고(疾苦)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원율은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담양 또한 나주목의 속현으로서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는 1236년(고종 23) 이후 최씨정권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을 조판하던 시기였다. 이 조판 사업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었는데,최씨정권의 경제력의 바탕을이루었던 
      전국 각지의 농장이 기저가 되었다.
      최씨정권의 농장 분포는 임피(臨陂) 진도(珍島) 강진(康津) 보성(寶城) 화순(和順) 
      승주(昇州) 남해(南海) 하동(河東)·진주(晋州)·단성(丹城) 등 전라·경상도 지역에 분포하였는데, 
      이로 보아 원율·담양도 최씨정권의 농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1182년(명종 12) 전주의 기두(旗頭)죽동(竹同) 등의 저항 배경이 
      관선(官船) 제조의 폐단에서 비롯되었듯이, 이연년 등의 저항도 팔만대장경 조판사업과 
      강도정부의 대민수탈의 폐단에 기인되어 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원율·담양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아”, 
      “적이 김경손(金慶孫)이 나주로 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 주성(州城)을 포위하는 데 
      적이 수풀처럼 빽빽이 모였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여기에 참여한 계층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연년이 스스로를 ‘백적도원수’라고 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의 오기(誤記)로 이해된다.
      이연년 형제를 필두로 한 대정부 저항은 앞서 최충헌정권 초기 
      경주의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 1217년(고종 4) 
      최광수(崔光秀)의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과 
      더불어 무신정권의 가혹한 불법행위에 맞서 
      새로운 질서구축을 기치로 삼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237년 나주성에 진주한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을 
      포위하여 싸우다가 이연년이 살해됨으로써 난이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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