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대 효종
■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송시열과 독대한 두 달 후 효종은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되어 어의 신가귀에게 침을 맞다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실록>은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 상태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혹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수전증의 의사가 옥체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침이 혈락을 범했다고 해서 사망할 수 있느냐는 점도 의혹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의혹을 끝까지 추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조정을 잡고 있는 산림과 서인들에게
북벌군주 효종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효종 사망의 모든 원인을 야강 도제조
원두표와 신가귀 등 약방에만 돌렸다. 현종 즉위년 5월 9일 대사헌 이응시와 행 대사간 이상진은,
원두표를 중도부처하고 어의 신가귀.휴후성.조징규를 사형시키라고 청했다. 결국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하고 다른 어의들은 중도부처되었으며, 원두표는 불문에 부침으로써 파문은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나 효종은 그냥 이렇게 이승을 떠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과 장지를 둘러싸고 계속 문제가 발생한다.
효종 사망 당일부터 시신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효종이 사망하자 왕비는 사람을 피해 어탑의
서북편에 병풍을 치고 들어가 가슴을 두드리며 발을 굴렀고, 여러 신하들은 어탑 주변에 둘러서서 곡하다가,
왕비가 있는 곳과 너무 가까워 물러났다. 훈련대장 이완이 훈련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왕비가 송시열을 불러 전교했다.
"옥체에 부기가 있으니 어찌 하리오."
송시열이 대답했다.
"이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보통 초상에 부기가 극도로 되면 도로 빠집니다. 이제 대렴할 날이
아직 멀었으니 그 전에 반드시 바로 될 것입니다."
과연 다음날 저녁에 부기는 빠졌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관의 폭이 염한 시신보다
작았던 것이다. 송시열이 내시를 불러 말했다.
"이 관에는 옥체가 들어가지 않을 듯하니 가는 댓조각을 가지고 시신을 재어 오라."
내시가 재어 온 바로는 과연 시신이 관턱을 걸치고도 남았다.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리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염한 옷이 너무 두터운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해 손으로
만져보았으나 아주 얇았다. 시신이 썩기 쉬운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힐 까닭이 없었다.
확실히 시신의 어깨가 관보다 넓었다. 정태화가 세자에게 말했다.
"망극한 가운데 더욱 망극할 일이 생겼습니다."
"망극 망극하오. 장차 어찌 하겠소."
"넓은 널판을 구해봤으나 구하지 못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널판을 잇는 것 외에 다른
계책이 없는 듯합니다."
국왕의 관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궁이라 하여 재궁이라고 표시한다. 이런 재궁을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너덜너덜 잇게 된 것이다. 또한 그러고도 그 책임 소재는 가리지 않은 채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 말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은 효종의 한이 거듭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당시 군신들 중에 풍수지리에 가장 능한 인물은 <어부사시사>의 윤선도였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장지로
수원부 청사 뒷산등성을 주장했고,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라고 호응했으므로, 세자는 이곳을 장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장지를 결정하는 데 풍수설을 쫓을 필요는
없고 다만 그 땅이 길이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의 문제를 뜻하는 5환만 없으면 된다는 이유였다.
5환은 송나라 사마광의 이론이었다. 이들은 수원의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농토가 비옥하고 사방으로
통한 곳이어서 5환에 해당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송시열도 차자를 올려 수원을 반대했다.
"대행왕(효종)께서는 수원을 7천 병력의 주둔지로 만들었고 장수와 수령을 보낼 때 가장 나은 사람을
뽑아 보내어 긴급할 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을을 철거하고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그곳 사람들을 슬프게 함은 결코 대행왕의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효종의 군비 확장에 안민론으로 맞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백성들의 생활을 명분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1백여 년 후 효종의 원손인 사도세자의 헌륭원이 세워진다.
정조가 헌륭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킬 당시 가구 수는 약 250여 호였는데, 내탕금으로
이주 비용을 마련해주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이는 시행 의지의 문제이지 민생의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정조가 헌륭원을 이곳으로 옮긴 후 수원이 더욱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볼 때, 군사를 내세운 반대론도 근거가 없다. 손을 떠는 어의가 옥안에 침을 놓는 것 하나
막지 못하고, 임금의 관 하나 제대로 마련 못한 신하들이 반대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효종 독살설을 전국에 퍼지게 했다. 실제로 효종이 죽기 직전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괴상한 일이 속출했다. 한 거사의 예언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할 무렵 한 거사가
돈화문 밖에서 외쳤다.
"금년 5월 궁중에 변고가 발생할 것이오. 이를 면하려면 전하께서 지금의 거처를 옮겨야 하오."
그러나 성리학 사회인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를 믿을 리가 없었다. 사대부들은 한마디로 요망하다고
일축해버렸다. 그런데 이어 해인사의 8만대장경 판목과, 속리사, 공산사 등 주요 사찰의 불상과 석탑
등이 여러 날 땀을 흘리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효종은 이런 변고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승하했다.
■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현재 남겨진 자료로는 효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다시 조사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다. 정말 효종은 침이 혈락을 범해 사망한 것일까?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송시열의 말대로 시신에 부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까?
또한 재궁이 시신보다 작은 것이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일까?
재궁이 왜 시신보다 작았을까?
효종 사망 다음달에 의관 이기선이 갑자기 엄형을 받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현종 즉위년 6월
현종은 어의 이기선 문제를 제기한다.
"지난달 초3일 밤 입진 때, 의관 이기선이 많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꽁무니를 뺄 생각으로
진맥할 줄 모른다고 아뢰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작년 편찮으셨을 때는 어떻게 맥을 논했다는 말인가?
그의 정상이 매우 흉측 교묘하여 엄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 처리하라.
지난달 초3일이면 효종이 세상을 뜨기 전날로 그때부터 효종의 몸에 부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현종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종비 인선왕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의 이기선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현종은,
이기선이 국문에서 원래 맥 짚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자 화를 냈다.
"맥 짚는 방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의원이 되었는냐?"
현종은 엄형을 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한의사가 맥을 짚을 줄 모른다는 말은 양의사가 주사를 놓을
줄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게다가 어의들은 왕비나 후궁을 진찰할 때 손목에 맨 긴 실만 잡고서도
맥을 짚을 줄 아는 실력이 있어야만 채용될 수 있었다.
현종은 분명 이기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엄형을 가해 정상을 알아내도록 한 것이다.
원래 현종은 어의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신하들이 효종의 죽음과 관련해 세 어의를
사형에 처하자고 주청했을 때 신가귀를 제외한 두 어의를 살려주었고, 또한 신가귀도
교형으로 한 등급 낮추어 목이 시신에 붙어 있게 배려해주었다. 그런 현종이
어의 이기선을 추궁한 것은 적지 않은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이기선을 옹호하고 나선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 등의 산당이다.
현종 즉위년 6월 7일 송준길이 신가귀 등 어의의 형을 빨리
윤허하라고 청했는데, 같은 당인 송시열과 정유성은
"이기선은 사실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며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이기선은 송시열의 이 주청으로 사지에서 구원되었다.
어쩌면 이기선은 송시열의 말대로 정말 맥을 짚을 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현종의 말대로 짚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원,
그것도 어의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산당세력이 신가귀 등은
굳이 빨리 형을 윤허할 것을 청하면서, 이기선은 왜 옹호하고 나섰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혹들을 남긴 채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다시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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