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맹자 (孟子)
403. 맹자 (孟子)
BC 28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유가에 속하는 사상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인의(仁義)의 도덕을 강조했다. 『맹자』는 「양혜왕편(梁惠王篇)」, 「공손추편(公孫丑篇)」, 「등문공편(滕文公篇)」, 「이루편(離婁篇)」, 「만장편(萬章篇)」, 「고자편(告子篇)」, 「진심편(盡心篇)」 등 모두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은 상하로 나뉘기 때문에 실제로는 14편인 셈이다. 7편 가운데 전반의 3편은 맹자가 천하를 돌며 유세하던 때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고, 후반의 4편은 은퇴 이후의 언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맹자는 BC 372년, 전국시대 중기에 추(鄒)나라[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의 사(士)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또는 자거(子居)라고 하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공자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은 맹자는 42~43세경부터 송(宋)나라, 등(滕)나라, 양(梁)나라, 임(任)나라, 제(齊)나라, 노(魯)나라, 설(薛)나라를 유세하고, 제후에게 인의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1) 를 설파했다. 제나라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8년 동안 중신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다른 학파의 사상가와 문답을 통해 유가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한 것도 그때였다. 약 20년의 유세를 마치고 62세에 고국 추나라로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BC 289년, 84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가 고향 추나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 만장(萬章)과 함께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장의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맹자 자신의 저술일 가능성도 있다. 또는 맹자가 세상을 떠난 뒤 만장이나 공손축이 맹자의 말을 정리하여 저술했다는 설도 있다.
『맹자』는 진(秦)나라, 한(漢)나라, 당(唐)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경전이 아니었다. 때문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제자’로 분류되어 있다. 그 뒤 송대에 이르러 유학이 성행하면서 유학자 주자(朱子)가 『맹자』를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와 더불어 ‘사서(四書)’로 삼고 『맹자집주(孟子集注)』를 저술했는데, 그 이후로 『맹자』는 유학 사상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경부터 중국에서 일어난 ‘공자 비판’ 속에서 맹자의 사상은 ‘노예 제도를 부활시킨 것’으로 취급되었다.
맹자에게는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패도(覇道)를 부정하고 왕도정치를 주장한 그의 정치론에는 휴머니즘 사상이 깔려 있다. 『맹자』 7편은 힘찬 문장과 적절하고 날카로운 비유, 뛰어난 논리로 맹자의 언행을 박력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문답체 문장은 그의 변론술을 잘 드러내고 있다.
1) 왕도정치(王道政治): 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는 덕치사상(德治思想)을 바탕으로 다스리는 정치 제도이다. 덕치사상은 공맹학(孔孟學)의 중심 사상으로,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 걸음 발전시켜 덕치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漢)나라 이후의 중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각국에서 치자(治者)의 으뜸 정치사상이 되었다.
■ 「양혜왕편」
맹자가 양(梁)나라[위(魏)나라], 제(齊)나라, 추(鄒)나라를 유세할 때의 기록으로, 각 제후에게 인정(仁政)을 설파한 내용이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패업에 대해 말해 주시오.”
“공자의 문하 가운데 패업에 대해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해진 바가 없기는 하지만, 꼭 듣고 싶으시다면 왕도(王道)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왕 노릇을 하려면 대단한 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오?”
“민생을 안정시키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왕 앞을 가로막는 적은 없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소?”
“호흘(胡齕, 선왕의 신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왕이 어전에 앉아 계실 때, 그 아래로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어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하고 물었다고 하더이다. 그 사람이 ‘피를 뿌려야 하는 제사를 지내러 갑니다’ 하고 대답하자, 왕께서는 ‘놔주어라, 저 소가 몸을 떨며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제사를 그만둘까요?’ 하고 그 사람이 묻자, 왕께서는 ‘어찌 제사를 그만둘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인지요?”
“그렇소이다만.”
“그런 마음이라면 충분히 옥좌를 지킬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소가 아까워서 그랬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소가 불쌍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그렇게 말하는 백성도 있었을 것이오. 하나 제나라가 아무리 좁고 작은 나라라고 한들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겠소. 나는 그저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을 따름이지요.”
“왕께서는 백성들이 인색하다고 비판하는 말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구했으니, 백성들이 어찌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어찌 소와 양을 가리시는지요?”
선왕은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체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가 아까워서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소가 아까워서 그랬다고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마음에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仁)에 이르는 길입니다. 왕께서는 소는 보았지만 양은 보지 못하셨습니다. 군자는 새와 짐승을 대할 때, 살아 있는 것은 볼 수 있으나 죽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죽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선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시경(詩經)』에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소이다. 내가 하고도 왜 그랬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선생께서 그 의미를 정확히 짚어 주었소. 그때의 내 마음은 분명히 선생의 말씀대로라 할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왕 노릇을 하는 데 적합한 마음가짐이라 하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 왕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3,000근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지만 새의 깃털은 들 수 없고, 가느다란 터럭도 볼 수 있을 만큼 시력이 좋지만 수레에 실린 섶은 볼 수 없다’라고 한다면 왕께서는 과연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안 믿을 테지요.”
“왕의 은혜가 금수에게까지 미치는데, 백성에게는 이르지 못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새의 깃털을 들 수 없는 것은 들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린 섶을 보지 못하는 것은 좋은 시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함은 선정을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 노릇을 잘 못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오?”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라고 하면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손윗사람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는데 못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쪽이 아닌, 손윗사람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버이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의 어버이를 존경하며,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자식을 사랑한다면, 천하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경』에 ‘내 아내에게 법도를 세워 형제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집과 나라를 다스리노라’라고 했으니,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널리 퍼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널리 은혜를 베풀면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고, 널리 은혜를 베풀지 못하면 처자를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의 왕이 특별히 위대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왕의 은혜가 금수에게까지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저울질을 해 봐야 가볍고 무거움을 알 수 있고, 자로 재어 봐야 길고 짧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물건이 다 이러할진대 마음이야 어떻겠습니까? 왕께서는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기어이 전쟁을 일으켜 병사와 신하를 위태롭게 하고, 제후와 원한을 맺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난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소? 다만, 내게는 큰 뜻이 있을 따름이오.”
“그 큰 뜻이 무엇인지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왕은 웃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맹자가 말했다.
“산해진미가 부족하십니까? 더 좋은 옷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더 아름다운 여자와 더 아름다운 음악과 귀여운 종들을 더 많이 거느리고 싶으십니까? 그런 것이라면 신하들이 충분히 마련해 드릴 것입니다. 설마 그런 바람은 아니시겠지요?”
“내 어찌 그런 것을 두고 큰 뜻이라 하겠소?”
“그렇다면 왕께서 품으신 큰 뜻이란 영토를 넓혀서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복종케 하고, 천하를 군림하면서 사방의 오랑캐를 회유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려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연목구어(緣木求魚)]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 뜻이 그렇게도 어리석단 말이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닙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설령 물고기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재앙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왕의 방식으로 뜻을 이루려면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야 할 테고, 그러면 재앙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 이유를 말해 보시오.”
“소국인 추(鄒)나라와 대국인 초나라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야 당연히 초나라가 이기겠지요.”
“그렇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이기지 못하고,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하며, 약한 것은 강한 것을 꺾을 수 없습니다. 천하에는 땅이 천 리나 되는 나라가 아홉이나 되는데, 제나라는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하나가 여덟을 이기겠다는 것은, 힘이 약한 추나라가 초나라를 이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정치의 근본을 올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왕께서 정치를 개혁해 인정(仁政)을 베풀면, 천하의 현신들이 왕의 조정에 서기를 원할 것이고, 천하의 농민들이 왕의 땅에서 밭을 갈고자 할 것이며, 천하의 장사치들이 왕의 시장에서 물건을 늘어놓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의 땅을 여행하고 싶어 할 것이며, 자기 나라의 왕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왕에게 하소연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에게 대적할 자 천하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렇게 할 자신이 없소. 선생이 나를 도와 밝게 이끌어 주시오. 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나 힘껏 해 보겠소.”
“일정한 생업 없이도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선비밖에 없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을 잃고 말며, 그러다 한번 타락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물론 범죄도 저지를 테지요. 죄를 저지르게 해 놓고, 잡아서 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을 쳐 두는 것과 같습니다. 덕이 있는 왕은 결코 자신의 백성을 그물을 쳐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왕은 백성에게 생업을 주어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하며, 풍년이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고 흉년을 당해도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을 기반으로 백성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도 기쁜 마음으로 왕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부모를 모실 수 없고, 처자를 거느리기 힘들며, 풍년이 들어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흉년이 들면 굶어 죽어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어느 누가 예를 닦고 정의를 이루려 하겠습니까? 만일 왕께서 천하의 지도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의 근본을 올바르게 세우셔야 합니다.
5무[五畝, 사방 6척(尺)을 1보(步)라 하고, 100보를 1무라 한다. 진(秦)나라 이후에는 240보를 1무라 했다]의 택지에 뽕나무를 심으면 쉰 살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이나 돼지, 개와 같은 가축의 번식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면 일흔 살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농번기에 농민을 징용하지 않으면 100무의 밭으로 일가족 8명이 먹고살 수 있고,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여 효제(孝悌, 부모와 형을 잘 섬김)를 가르치면 백발노인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니, 노인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정치를 행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 「공손추편」
대부분이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렀을 때의 기록이며, 선왕과의 문답이나 맹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의 정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설(四端說)’[사람에게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있어서 이로부터 예와 지혜가 싹튼다고 했다]이 여기에 나온다.
■ 「등문공편」
묵가(墨家)와 농가(農家), 종횡가(縱橫家)를 비롯한 각 파의 사상가와 나눈 문답으로, 그들의 사상과 유가(儒家) 사상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 「이루편」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의(仁義)와 효양(孝養), 반성(反省) 등을 논하고 있다.
■ 「만장편」
주로 맹자가 만장(萬章)과 나눈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고대의 성인 요순(堯舜)의 전설이나 공자의 언행과 함께 유가가 이상으로 삼는 인물상을 논하고 있다.
■ 「고자편」
주로 인간의 본성을 논하고 있다. 맹자는 고자(告子)각주1) 와 나눈 문답을 통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성선설(性善說)’을 펼치고 있다.
■ 진심편」
천명(天命)과 마음,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맹자가 은퇴한 이후의 어록으로 보인다.
□ 책 속의 명문장
浩然之氣 / 호연지기
맹자가 제자 공손추와 용기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 논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으며 강하니, 곧은 것으로 길러 해하는 것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는 것이 기(氣)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義)와 올바른 길(道)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면 얻을 수 있지만 마음이 흐트러지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공손추편」
五十步百步 / 오십보백보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데 왜 백성이 늘어나지 않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전쟁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둥둥둥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를 따라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는데 어떤 사람은 백 보를 가서 멈추고, 또 어떤 사람은 오십 보를 가서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이 백 보를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십 보건 백 보건 도망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와 같은 선정(善政)으로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
「양혜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