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 /소설과 희곡

302. 낙양가람기 (洛陽伽藍記)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2. 23:44

302. 낙양가람기 (洛陽伽藍記)

저작자 양현지(楊衒之)

 

547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6세기 중국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을 무대로 인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제목 그대로 북위의 수도인 낙양의 사찰 연혁을 조사하면서 정치 풍속에서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 무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섬세하고 장대하게 기록했다. 5권을 성내(城內) · 성동(城東) · 성남(城南) · 성서(城西) · 성북(城北)으로 나누고, 북위의 전성기로 거슬러 올라가 각 사원의 모습과 그 사원에 얽힌 암투와 인물, 풍속 등을 소박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기술했다.

 

저자 양현지는 어떤 인물인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가 쓴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동위(東魏) 무제(武帝) 5(547)에 공적인 일로 여행을 하다가 다시 낙양에 들렀는데, 성벽은 무너지고 궁전은 기울었으며, 사원은 재로 변하고 묘탑은 폐허가 된 광경을 보고 이를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북위의 전성기에서 멸망에 이르는 6세기 전반에, 그리 높지 않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짐작된다.

 

이 책은 사료로서도 귀중하며,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글이다. 기록 문학 가운데서도 지리 분야에 속하며, 수경주(水經注)와 함께 문학적으로 뛰어난 자료로 꼽힌다.

 

 

 

 

폐허가 된 낙양의 옛 영화를 기록

 

북위는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약 150년 동안 낙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북위는 투르크족의 한 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목민족 선비(鮮卑)의 탁발부(拓跋部)가 화북 지방에 세운 왕조이다. 북위의 지배자들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문화적으로는 크게 발전했으나, 상무 정신이 쇠퇴해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실상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의 서쪽 대진(大秦, 로마 제국)에 이르는 100개의 나라와 1,000개의 성은 한결같이 중국을 흠모한다. 매일같이 오랑캐의 상인 무리들과 행상인들이 우리나라의 국경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 중국을 흠모해 거주지를 옮기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래서 귀화하는 외국인이 1만 호 이상이나 된다. 도시는 질서정연하게 세워지고, 집들의 문은 한 줄로 나란히 정렬했으며, 회화나무는 길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마당에는 녹색 버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또한, 천하의 귀한 물자라는 물자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3, 용화사(龍華寺) ]

 

이렇게 번성한 도시에서 영화를 누린 사람은 물론 황족들이었고, 사원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낙양에 사원이 많이 건설된 시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제8대 효명(孝明) 황제 때부터이다. 그때 실권을 잡고 있던 황태후인 영태후(靈太后)는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세웠고, 그것 때문에 재정이 궁핍해져 민심을 잃었다. 그것이 결국 북위가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는데, 황족들은 그저 권력 투쟁과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했다. 5대 헌문(獻文) 황제의 아들이며 영태후 섭정 때 승상을 지냈던 고양왕(高陽王) ()은 영태후의 정적이었던 황족 원예(元乂)를 죽인 공으로 호화로운 저택을 선물 받았다. 그 저택에서 6,000명의 종과 500명의 가기(家妓)를 거느리며 생활했던 옹은 먹는 걸 밝히는 사람이었다.

 

입이 까다롭고 산해진미에 탐닉해 한 끼에 수만 전을 소비했다. 산해진미를 사방 1()에 늘어놓고 먹었다.” [3, 고양왕사(高陽王寺) ]

 

뒷날 산서(山西)에 사는 유목민족의 우두머리인 이주영(爾朱榮)은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함락시킨 뒤 영태후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옹 또한 죽이고는 그 저택을 절로 삼았다. 어쨌든 영태후 시절은 북위의 전성기이자 동시에 파국으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그즈음 나라는 풍요로워 창고는 물자로 넘쳐 났고, 복도에 쌓인 동전과 비단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태후는 백관에게 비단을 하사하면서 가지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 했고, 신하들은 힘이 닿는 대로 비단을 끌어안고 돌아갔다. 그런데 장무왕(章武王) (, 장군으로서 싸움에서는 매번 졌지만 욕심이 많았다)과 진류후(陳留侯) 이숭(李崇, 뛰어난 전략가이자 구두쇠로 유명했다)은 비단을 너무 많이 지고 가는 바람에 그만 넘어져 발목을 삐고 말았다.” [4, 황족의 거주 지역이었던 수구리(壽丘里) ]

 

구두쇠 이숭에 대한 이야기는 3권의 고양왕 조항에도 나온다. 식사 때는 늘 부추 조각과 부추절임만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한 끼에 18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고 놀렸다. 왜냐하면 2()18[중국어에서 부추를 뜻하는 는 숫자 아홉을 뜻하는 구()와 발음이 같음]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고양왕의 한 끼는 자신의 1,000일 치 식사에 해당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조와 남조의 생활 풍습을 비교

 

그러나 저자 양현지가 보았던 낙양의 번영도 이주영의 반란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다. 그 뒤 북위는 업()을 수도로 하는 동위(東魏)와 장안을 수도로 하는 서위(西魏)로 분열됐다.

 

양현지는 전란 뒤의 황폐한 낙양을 보고 옛날을 그리워하며 붓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회나 의견은 결코 드러내지 않고, 영태후 시대의 낙양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1권의 서두를 장식한 것이 바로 영태후가 세운 대사원으로, 낙양의 영광을 상징하는 영령사(永寧寺) 조이다.

 

영령사에는 바람 부는 가을밤에는 화사한 금방울 소리가 10리까지 울려퍼졌다고 할 정도로 그 시대의 첨단 건축 기술을 구사한 9층탑이 있었는데, 영태후는 그 탑에 올라가 도시를 조망했다고 한다. 반란을 일으킨 이주영은 이 절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영태후의 세력을 무너뜨린 다음, 9대 효장(孝莊) 황제를 옹립했다. 그러나 결국 효장 황제도 이주영의 부하에게 사로잡혀 진양(晋陽)으로 이송되었다가 교살당하고 만다.

 

황제는 임종 때 부처에게 절을 올리고 다음 생에는 국왕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고 한다. 그 뒤 영령사 9층탑은 화재로 무너졌는데, 1년이나 지난 뒤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고 한다.

 

이주영의 난을 중심으로 한 권력 투쟁의 양상 외에, 북조(北朝) 사람과 남조(南朝) 사람의 생활 방식에 관한 차이를 알려 주는 시정(市井)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북위가 융성했을 때, 북조의 사족(士族)은 남조의 사족에 대해 거만하게 굴었다. 양원신(楊元愼)이라는 화북 출신의 사족이 강남 사람은 차만 마셔대는 땅딸보라고 비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 경령사(景寧寺) ]. 실제로 강남 사람들은 화북 사람을 대접할 때도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강남에서 온 상서령(尙書令) 왕숙(王肅)은 북조 사람이 늘 먹는 양고기나 유제 음료[(). 우유 · 양젖 등을 정제한 끈적한 음료]를 좋아하지 않아 늘 생선죽을 먹고 차를 마셨으며, 차를 유제 음료의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북위에서는 차를 낙노(酪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3, 왕숙이 세운 정각사(正覺寺) ]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한 예로, 15세 때 죽었다가 무덤 속에서 12년을 산 다음에 다시 살아났다는 최함(崔涵)이란 남자 이야기를 들어 보자.

 

무덤에서 나온 이 남자는 자신이 성의 서쪽 부재리(阜財里,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 사는 최창(崔暢)의 아들이라 자칭했다. 그러나 최창은 문 앞에 불을 피운 뒤 칼을 들고 그를 막았으며, 그 아내 위()씨는 복숭아 나뭇가지(귀신을 쫓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를 흔들며 최함을 쫓아냈다.

 

너는 절대로 여기에 와서는 안 돼. 너는 우리 자식이 아니다. 빨리 돌아가지 못할까! 재앙은 싫다.”

 

최함은 하는 수 없이 도성을 떠돌다가 절 문 앞에서 잠을 잤다. 낙양대시(洛陽大市)라는 시장의 북쪽에 있는 봉종리(奉終里)는 장례식 도구나 관을 파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최함이 거기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노송나무로 관을 짤 때는 뽕나무를 바닥에 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지하에 있을 때 죽은 사람이 병사로 징병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죽은 사람 하나가 나는 노송나무 관이니까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징병관이 분명 노송나무 관이기는 하지만 바닥을 뽕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소용없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노송나무 가격이 폭등했다. 사람들은 관을 파는 상인이 최함에게 뇌물을 주어 그런 말을 하게 했다고 의심했다. [3, 보리사(菩提寺) ]

 

그대는 해 뜨는 나라에서 왔는가?

 

덧붙여 5권에 나오는 송운(宋雲)과 혜생(惠生)의 서역 여행에 관한 기록[송운기행(宋雲紀行)]도 그 무렵 서역과의 교통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2월 초에 오장국[烏場國, 인도의 우디야나(Uddiyana) 지방]에 들어섰다. 북쪽은 파미르 고원과 접하고, 남쪽은 천축(인도)으로 이어지며, 기후는 온화하고 영토는 사방 수천 리이다. 인구도 많고 물자도 풍부해 임치(臨淄)의 신주(神州)에 비길 만하다. 전답은 비옥하고 아름다워 함양(咸陽)의 일등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곳은 비라[鞞羅, 불교 13대 조사(祖師)]가 자식을 바치고 살타(薩埵, 보살)가 몸을 던진 곳이다. 그런 관습은 먼 옛날의 일이기는 하나, 지금도 그런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국왕은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채식으로 몸을 청결히 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처에게 절을 올릴 때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비파 · 공후 · 생황(笙簧) · ()를 연주한다. 점심때가 지나면 업무가 시작되는데, 설령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고 산속으로 추방해 살 수 있게 한다. 흑백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을 때는 약을 먹인다. 그러면 흑백이 금방 가려진다. 모든 것은 경중을 따져 그 자리에서 곧바로 결정한다. 토지는 비옥하고, 인구도 많으며, 물자도 풍부하다. 오곡은 풍성하게 맺히고 과일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달린다. 밤에는 범종 소리가 멀리까지 은은히 울려퍼진다. 땅에는 희귀한 꽃이 많은데, 겨울에서 봄에 걸쳐 핀다. 승려와 서민들은 그 꽃을 따다 불전에 바쳤다.

 

국왕은 송운이 대위(大魏)의 사자로 왔습니다라고 하자, 동쪽을 향해 합장하고 최고의 예절로 맞이했다. 중국어를 아는 사람을 내세워 송운에게 그대는 해 뜨는 나라에서 왔는가?” 하고 물었다. 송운은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바다가 있고, 해는 거기서 뜹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나라에서 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왕은 그 나라에서도 성인이 나왔는가?” 하고 물었다. 송운은 주공(周公) · 공자(孔子) · 노자(老子) · 장자(莊子)의 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봉래산(蓬萊山) 위의 은궁(銀宮)과 금당(金堂)에 대한 이야기, 신선과 성인이 함께 그곳에 산다는 이야기, 그 밖에 점성술의 대가 관로(管輅)와 명의 화타(華陀), 방술의 달인 좌자(左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가 사는 그 나라야말로 불국토(佛國土)가 아닌가. 다음 생에는 그 나라에 태어나 살고 싶구나.”

 

그런 다음, 송운은 혜생과 함께 여래의 흔적을 찾아 성 밖으로 나갔다. (5, 오장국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