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의 샘/ Classic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작품.2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2. 20:51


Pyotr Il'ich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Op.23
피아노 협주곡 1번 작품.23
RCA Symphony Orchestra
Cond: Kirill Kondrashin Piano : Van Cliburn


    1악장 Allegro Non Troppo (20;44) 2악장 Andantino Semplice; Prestissimo (6;51) 3악장 Allegro Con Fuoco (6;12)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 협주곡을 3곡 썼는데, 제1번이 가장 유명하고 나머지는 거의 잊혀져 있는 상태이다. 이 작품을 그는 35세때인 1874년 말에 완성했다. 모스크바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된 지 9년째 되던 해였다. 음악원의 원장은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이며 피아노의 대가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이었다. 유태계 러시아 인이었던 그들은, 유명한 러시아 5인조로부터는 서구식 음악가들이라고 따돌림받았지만 역으로 형제들은 5인조를 형편 없는 촌뜨기 정도로 우습게 보았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외가에 프랑스인의 피가 섞여서인지는 몰라도 꽤 서쪽으로 기울어진 작곡가라는 평판도 있거니와, 자기를 음악원의 교수로 알선해 준 선배이기도 한 니콜라이에게는 항상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피아노 협주곡의 첫 야심작인 제1 번을 니콜라이에게 헌정하면서, 역시 피아노의 명수인 그가 초연의 피아노를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1874년 12월 24일 차이코프스키는 완성된 스코어를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보였다. 그러나 반응은 전연 뜻밖이었다. 악보를 상세히 검토하고 난 루빈슈타인은 "이건 피아노 협주곡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야하고 독창성도 없는, 말하자면 졸작에 속하는 곡이다" 라고 혹평했다. 너무나도 상심하고 격분한 차이코프스키가 옆방으로 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뒤쫓아 온 루빈슈타인은 상당한 부분을 개작한다면 초연을 맡아주마고 위로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곡에 자신을 갖고 있었던 그는 니콜라이의 제의를 거절하고, 벌써부터 자기 작품에 호의를 표시해 왔던 독일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한스폰 뷜로 (바그너에게 마누라를 빼앗긴 사람) 에게 스코어를 우송하고 초연을 담당해 주도록 부탁했다. 뷜로한테 곧 답신이 왔는데 아주 독창적이고 경탄할 만한 명곡이라는, 니콜라이와는 정반대의 평이었다. 그 때 마침 미국 보스턴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있던 뷜로는, 그 악보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기가 피아노를 담당하고 보스턴의 교향악단과 협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당시까지 러시아 안에서 작곡된 모든 작품들은 국내에서 초연되던 관례를 깨뜨린 최초의 케이스가 되기도 했다. 헌정하는 상대가 한스 폰 뷜로로 바뀐 것은 물론이었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그 곡의 초연이 있은 지 3 년 후 차이코프스키에게 사죄하고, 그 후로는 자기의 레퍼토리에도 자주 넣었기에 두사람의 우정은 회복되었다. 루빈슈타인이 처음에 차이코프스키를 매도한 것은 그와 같은 피아노 대곡을 작곡하면서 선배이자 피아노 대가인 자기에게 한마디의 가르침도 요청 안한 것이 쾌씸했기 때문이며, 후에 그 곡이 워낙 유명해지고 다투어 각국에서 연주되자 하는 수 없이 백기를 들었으리라는 후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도 성깔은 어지간히 있어서 처음에 루빈슈타인이 더러 수정을 요구했을 때는 완고하게 한군데도 손을 안 댔다가, 니콜라이가 죽은 지 8년 후가 되어서야 아무한테도 신경 쓰는 일 없이 스스로도 미진하다고 여겨 왔던 부분을 수정해 현행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 처음에 면박을 받은 건 그 곡만이 아니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초고를 당시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였던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보이고 초연을 부탁한즉, '연주 불가능!', 한마디로 퇴짜를 맞았다. 하는 수없이 당시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였던 러시아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바이올린 독주, 그리고 협연은 빈 필이 맡아 빈에서 초연했는데 지휘자 리히터나 청중이나 비평가나 다 외면했다. 특히나 당시 평론계를 주름잡던 대평론가 한스리크는 거의 치명적인 혹평을 내렸다. 그래도 브로드스키는 굴치 않고 연주 여행을 갈 때마다 각처에서 그 곡을 연주해 겨우 인정받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의 것들과 더불어 4 대 바이올린협주곡의 하나가 되었다. 이야기는 다시 피아노 협주곡으로 돌아가 제1 번 뒤에 작곡된 제2 번, 제3 번은 처음부터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등이 기꺼이 초연을 맡아 주었다. 그때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곡들은 아무래도 별로일 거야. 내 협주곡은 퇴짜를 맞아야 명곡이 되는데---" 과연 그의 예측대로 현재 그 두 곡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품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