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초한지 卷二 / 1장 大澤의 회오리(2)
그때 장위(將尉)는 술에 취해 있었다. 큰비로 기한을 넘겨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 심사를 술로 풀고 있던 중이었다. 오광은 바로 그 앞으로 가서 자기를 따르는 수졸들을 돌아보며 짐짓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젠 기를 쓰고 어양으로 가봐야 목 날아갈 일밖에 남지 않았어. 모두 도망치자구! 그래서 목숨이나 건지는 게 상책이야.”
그러잖아도 불콰하게 술잔을 비우고 있던 장위는 그 말에 벌컥 성을 냈다.
“네 이놈. 너는 둔장(屯長)으로서 나서서 말려야 할 처지에 되레 그 무슨 되잖은 소리냐? 나라의 엄한 법이 무섭지도 않느냐?”
“나라 법이 무서우니, 우선 목숨이나 건지자고 하는 소리 아니요? 장위님도 무턱대고 미련댈 처지는 아닌 듯싶소. 목이 날아가도 우리보다 먼저 날아 갈테니......”
오광이 그렇게 이죽거려 장위의 부아를 돋우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장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곁에 있던 채찍을 집어들었다.
“네 이놈.”
장위(將尉)가 긴 말 할 것도 없다는 듯 채찍을 휘둘렀다. 오광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채찍을 휘어잡고 한번 더 이죽거렸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함께 목 없는 귀신이 될 처지면서…”
장위가 용을 써 보았으나 오광이 워낙 팔 힘이 좋아 채찍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참지 못한 장위는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었다.
그러잖아도 자기들이 우러르고 따르는 오광을 장위가 함부로 욕보이는 것 같아 못마땅하던 수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칼까지 빼어드니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평소 두려워하던 장위였으나, 이제는 모두가 오광 편이 되어 험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오광이 기다린 것은 그런 분위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졸들이 모두 자신을 편들어 주리란 믿음이 생기자 처음부터 별렀던 대로 손을 썼다. 채찍을 감아쥐고 있던 손을 놓은 뒤, 날쌔게 장위를 덮쳐 오히려 그가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버렸다.
오랫동안 복종 받는데 익숙해 있던 장위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진(秦)제국의 권위를 빌어 오광을 억눌러 보려 했다.
“이놈, 네가 감히…”
한껏 소리를 높여 오광을 꾸짖으려 하는데 칼빛이 번쩍하더니 장위의 목이 떨어졌다. 그때 멀찌감치서 보고있던 진승이 다가와 오광에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사람들부터 모으게. 여기 있는 사람들부터 우리편으로 끌어들여야겠네.”
그 말에 오광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시켜 수졸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했다. 오광이 진나라 관리를 죽인데다가, 이미 그들 사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진승이 함께 있다고 하니 수졸들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그리로 모여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진승이 나서서 그들을 보고 외쳤다.
“여러분 내가 바로 진승이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소!”
그러자 수졸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찬 눈길로 진승을 바라보았다. 진승이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간곡하면서도 결연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큰 비를 만나 어양에 닿아야할 날짜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진나라의 모진 법에 따르면 기한을 어긴 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해 마땅하다. 곧 이대로 가면 그대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용케 용서를 받아 변방의 수자리를 산다 해도 그대들이 살길은 별로 없다. 듣기로 변방은 땅이 험하고 오랑캐들은 흉악해 그곳을 지키다 죽는 사람이 열에 일고여덟이라 한다. 장사(壯士)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죽어야 한다면 반드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는 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제 그대들은 나를 따라 진나라를 둘러엎고 새 세상을 열어보지 않겠는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것이라더냐!”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 [후왕장상 영유종호]’라는 말은 반드시 진승이 지은 말도 아니었다. 진나라의 폭정이 벌써 여러 해 거듭되면서 불평가나 야심가들 사이에서 은밀히 떠돌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 진승이 여럿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자 그 말은 우레소리처럼 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삼가 크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졸들이 한결같이 진승과 오광 앞에 엎드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진승과 오광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충성을 강요할 수 있는 권위까지 조작했다. 진작부터 짜놓은 대로 이번에는 오광이 나서 여럿을 보고 소리쳤다.
“여기 이 진승이란 분은 실은 부소(扶蘇) 태자님이시오. 어질고 재능 있는 분이었으나 일찍이 바른 말로 시황제에게 간언을 드리다가 미움을 받아 쫓겨나셨소. 하지만 시황제는 죽기 전에 그래도 맏이 되시는 여기 이 부소 태자님께 제위(帝位)를 물려주었다 하오. 그런데 지금 이세 황제가 된 영호해(쒙胡亥)가 대신들과 짜고 유조(遺詔)를 위조해 제위를 훔치는 바람에 이렇게 숨어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고 말았소! 또 여기 이 몸도 참된 이름은 항연(項燕)이오. 일찍이 초나라를 위해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육국(六國)을 차례로 쳐부수고 밀려드는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잠시 몸을 감추고 초나라 복국(復國)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외다. 이제 나는 부소 태자를 도와 태자께는 진나라의 제위(帝位)를 찾아주고, 천하는 예전처럼 칠웅(七雄)이 나란히 번창하는 형국으로 이끌려고 하오. 그리되면 우리 초나라도 다시 서게될 뿐만 아니라, 천하 모두가 각기 자신의 옛나라를 찾게될 것이오.”
냉정하게 따져보면 진나라 태자 부소와 그 진나라에 맞서 싸우던 초나라의 장수 항연이 난데없이 한편이 되어 일을 벌이는 게 이상할 수도 있었으나 수졸들은 그대로 믿어주었다. 어쩌면 정말로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부소와 항연은 당시 백성들에게서 우러름을 받았고, 세상은 그들이 살아있어 바닥부터 뒤집어엎어 주기를 기다릴 만큼 살기가 어려웠다.
진승과 오광을 우두머리로 받든 수졸들은 모두 오른 쪽 어깨를 벗어 한편임을 나타내고 스스로 일컫기를 ‘대초(大楚)’의 군사라 했다. 또 높게 단을 쌓아 충성을 맹서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제물은 바로 오광이 목 벤 장위의 머리였다.
거기서 장군으로 높여진 진승과 도위(都尉)가 된 오광은 먼저 대택향(大澤鄕)의 관아를 들이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봉기를 천하에 알리기로 했다. 대택향은 인적이 드문 늪지와 못들 사이의 기름진 땅을 개척해 만든 외진 고을인데다, 그곳을 지키러 나와있는 진나라 병사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훈련되어 있었고 병기는 날카로웠다.
이에 비해 진승의 무리는 비록 수졸(戍卒)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병기도 지급받지 못했다. 오광이 죽인 장위와 그를 따르는 관병에게서 뺏은 창칼 몇 자루 외에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육국을 쳐 없앤 시황제가 천하의 병기를 모두 함양에 모아 녹인 뒤 동인(銅人)과 농구(農具)를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때가 무르익은 것인지 진승을 따르는 무리의 기세는 드높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달았다. 비록 손쉬운 대로 구해 쥔 농구(農具)나 죽창에 몽둥이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들 900명이 한꺼번에 밀고 들자 대택향 관아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대택향은 진(秦)제국에 맞서 첫 번째로 봉기(蜂起)가 있었던 땅으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진승과 오광은 그 운 좋은 승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곳을 기반으로 군사를 더 모으고 병장기를 새로이 벼리게 해 다시 이웃 기현(뎊縣)으로 쳐들어갔다.
기현만 해도 오래된 고을이라 대택향보다는 뺏기에 힘들어 보였다. 지키는 군사만 해도 현위(縣尉)가 거느린 그 지역 출신의 현군(縣軍)에다 적지 않은 진나라의 수비병까지 나와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한바탕의 힘든 싸움을 각오했으나, 다행히도 기현 또한 힘들이지 않고 차지 할 수 있었다. 인근 백성들 사이에서 뽑은 현군은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린 끝이라 싸울 뜻이 없었고, 진나라 병사들은 워낙 처음 겪는 농민들의 저항이라 당황하고 혼란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미 한 번 승리를 맛보아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진승의 무리가 들이치니 당해낼 수 없었다.
대택향에 이어 기현까지 차지하자 봉기의 불길은 한층 거세게 타올랐다. 진승은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쒚)에게 군사를 나눠주며 기현 동쪽의 고을들을 아우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광과 더불어 나머지 장졸을 이끌고 인근의 다른 고을들을 휩쓸었다.
질현(9縣) 찬현(첯縣) 고현(苦縣) 자현 (쨞縣) 초현(춍縣) 등이 차례로 봉기군(蜂起軍)에게 떨어졌다. 진승과 오광은 그렇게 땅을 확장해 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군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늘려갔다. 그리하여 그들이 진(陳)땅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전거(戰車)가 7백대에 기병(騎兵)이 천여 기(騎)요, 보졸(步卒)은 수만 명이 넘었다. ‘과진론(過秦論)’에는 그 기세를 이렇게 요약했다.
‘…(진승이) 한번 병사들 사이에 몸을 던져 수많은 사람들을 굽어보는 그 우두머리가 되자, 피로에 지치고 혼란되어 흐트러진 수졸(戍卒)들을 이끌어, 그 수백 대오의 창끝[矛頭]을 진나라로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병기를 만들었고 죽간(竹竿)을 높이 쳐들어 기치를 삼았는데, 진의 폭정에 시달리던 천하 백성들이 바람에 몰린 구름같이 모여들어 호응하고 떨쳐 일어났다...’
진군(陳郡)은 초나라의 서북에 치우쳐 있지만, 치소(治所)가 있던 진현(陳縣)은 초나라가 마지막으로 도읍을 삼았을 만큼 중원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아주 요긴한 땅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대군을 몰아 진현의 성곽을 에워쌌다. 그것은 진(秦) 조정이 임명한 군수가 적지 않은 정규군 장졸을 거느리고 방어하고 있는 굳건한 성을 훈련 안된 농민군으로 공격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의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쳐 없애 천하를 위압하던 그 진나라가 아니었다. 군수와 현령은 앞을 다투어 달아나고 군사들도 달아나는 수령들을 따라 흩어져 버렸다. 겨우 수승(守丞·부군수 정도) 하나가 몇 안 남은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킨답시고 초루(성곽의 전망대)위를 불안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