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2>초한지 卷一 / 6장 亡命(2)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1. 20:10

"저는 젊어서부터 남의 관상보기를 좋아해 많은 사람의 상(相)을 보아왔습니다만, 귀공(貴公)만한 호상(好相)은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안으로 드시어 몇 말씀 더 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유계가 마지못한 듯 내실로 따라 들어가자 여공은 먼저 그의 아내를 불러 술상부터 새로 차려 오게 했다. 그리고 술상이 나오자 몇 순배 술잔이 돌기도 전에 문득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1만 가지 상 가운데서 마음의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만상불여심상] 했습니다. 비록 공의 상이 좋다하나, 앞으로 한층 삼가고 힘써 마음의 상을 닦으셔야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하는 바는 제게 딸이 하나 있는데, 키와 비[箕욌]를 들고 공을 따르게 하고 싶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이 아이도 상(相)으로는 공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유계로서는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 용의 아들이라고 우기고, 거리에 나가면 물불 안 가리고 따르는 주먹들도 몇 명 있었지만, 지난날의 그는 속절없는 장돌뱅이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소하 덕에 겨우 정장의 자리를 얻어 검수(黔首〓일반 백성) 신세를 면한 그때라고 해서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벼슬자리라는 게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미관말직이요, 농군의 막내라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니, 서른을 훌쩍 넘긴 그때까지 아무도 딸을 주려 하지 않았다. 멀쩡한 것은 허우대뿐 돌아볼수록 한심한 게 그때 유계의 처지였다.


그런데 비록 원수를 피해오기는 했지만, 만만찮은 인맥과 재력을 가진 여공 같은 사람이 딸을 주겠다니 어지간한 유계도 처음에는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겸양을 가장해 여공의 진심을 알아보려 했다.


“실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같이 하찮은 필부(匹夫)에게 어르신의 귀한 따님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자 여공은 오히려 후끈 단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 딸이 못생기고 둔하여 마다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허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번 보시고 정히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물리치셔도 좋습니다. 그때는 더 조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딸까지 불러들여 유계에게 떠맡기듯이 혼인을 성사시켰다. 나중에 소문으로 돈 말이지만, 그날 여공은 성난 아내와 한바탕 크게 다투었다고 한다. 남편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긴 그의 아내는 유계가 돌아가자마자 대들 듯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예전부터 우리 딸이 비범하다 하시면서 귀인(貴人)을 골라 시집보내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래서 패현 현령이 딸을 달라해도 주지 않으시더니, 이제 와서 어찌 유계 같은 허풍선이에게 함부로 주어버리려 하세요?”


“이 일은 아녀자가 알 바가 아니오. 내가 기다린 귀인이 바로 유계 같은 장부였소.”


여공은 그렇게 아내의 입을 막고. 며칠 뒤 맏딸을 유계에게로 시집보냈다. 뒷날 고후(高后)라 불리게 되는 여씨(呂氏)였다.


얼른 보아 이 혼인 일은 여공의 남다른 관상 능력을 신비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헤아려 보면 실은 그의 남다른 눈썰미를 말해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


원수에게 쫓겨 낯선 땅으로 도망쳐온 사람이 가장 예민하게 살피는 것은 그 땅의 세력판도 내지 역학(力學)구조일 것이다. 이미 머지않은 난세를 예감한 여공은 곧 무너질 정규 권력구조 속의 현령에게서보다 감추어진 세력의 한 핵이 되는 유계에게서 자신의 일가를 지켜줄 힘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다가 소하처럼 현청의 실권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실정에도 밝은 관리가 유계를 대하는 태도는 그 느낌을 믿음으로까지 끌어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같은 여공의 눈썰미는 둘째 딸 여수(呂須)를 시집보내는 데도 활용된다. 여공은 둘째 딸까지 유계를 따라 다니는 개백정 번쾌에게 떠맡기듯 시집 보내고 다시 성나 덤비는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유계보다야 못하지만 장상(將相)으로 제후의 열에 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부인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여전히 관상을 내세우고 있어도 실제 그가 본 것은 번쾌의 비상한 충성심과 무용(武勇)이었을 것이다. 유계에게 바쳐지고 있는 그것들은 소하나 조참의 은밀하면서도 지극한 보살핌과 마찬가지로 때가 오면 눈부신 성취로 바뀌리라 믿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이 정한 때[天時]를 말하며, 바람과 구름[風雲]의 조화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때는 무엇이고 그 조화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일까)


유계는 죽피관(竹皮冠)을 짜던 손길을 멈추고 하늘 높이 이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일찍부터 스스로 용의 자식임을 떠벌리고, 허벅지에 난 일흔 두 개의 검은 점을 무슨 심상찮은 조짐이나 되듯 자랑하고 다녔지만, 기실 그의 내심은 아무 것도 믿고있지 않았다. 남 앞에 이렇다 하게 내놓을 것이 없는 농군의 자식이라, 거기서 오는 열패감(劣敗感)이 오히려 그런 터무니없는 허세를 부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로 베푸는 것도 없는데 노관과 번쾌를 비롯해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르고, 특별히 의도하지 않는데도 저잣거리에 자신의 전설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좀 별난 느낌은 있지만 유계에게는 도무지 실감도 나지 않거니와, 구체적으로 그런 일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 당장 나쁠 것 없어 받아들이고 있을 뿐, 그것들이 뒤얽혀 빚어낼 앞날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여공을 만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공이 말한 것은 관상이 아니라 자신에 향한 바람과 믿음의 표현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게 그랬다. 그러고 보니 번쾌나 하후영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서투른 이들뿐만 아니라, 노관이나 소하 조참 같이 제법 말주변이 있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드러내지 않는 것도 여공과 같은 바람과 믿음임에 틀림없었다.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고. 또 내가 그것을 해내리라고 믿고 있다 - 그런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고양(高揚)까지 느꼈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 들른 중양리(中陽里) 고향집에서 겪은 일은 유계에게 묘한 자신감까지 주었다. 정장의 녹봉은 두식(斗食〓녹봉 1백석 이하) 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그 녹봉으로는 따로 살림을 나기 어려워 유계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버지 유태공(劉太公)에게 맡겨두고 이따금 휴가를 얻어 찾아보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다시 고향집을 찾으니 마침 들에서 돌아온 아내 여씨(呂氏)가 이상한 말을 했다.


“제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어떤 늙은이가 지나가다 마실 것을 청하더군요. 보니 목마를 뿐만 아니라 주린 기색이 있어 저는 마실 것과 아울러 먹을 것까지 내주었지요. 그걸 달게 먹고 마신 늙은이가 문득 저를 쳐다보더니 한참 있다가 말했습니다. ‘부인께서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귀인이 될 상(相)을 가지셨습니다. 부디 자중하시어 그 상을 이루십시오’ 라고요. 그런데 그 말투나 태도가 왠지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는 머지 않은 곳에서 뛰놀고 있는 영아(盈兒〓 劉盈. 뒷날의 漢 孝惠帝)를 불러 그에게 보였지요. 그러자 영아를 찬찬히 살펴본 그 늙은이가 감탄하며 ‘부인께서 귀하게 되시는 것은 바로 이 아이 때문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욕심이 난 저는 이번에는 노원(魯元 〓 뒷날의 魯元公主)까지 불러 보였습니다. 늙은이가 다시 한참 동안이나 딸아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귀상(貴相)입니다. 오늘 이 늙은 것이 일생에 만나볼 수 있는 귀한 상을 한꺼번에 모두 뵙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정말 알 수 없는 늙은이였어요.”


그 말에 유계는 쉬고 있던 방사(旁舍〓본채에 딸린 집)에서 한달음에 달려나왔다. 장인 여공에게서 상 이야기를 들은 뒤로 유계는 야릇한 열정 같은 자기확인의 욕구에 빠져 있었다.


“그 늙은이가 어디로 갔소?”


유계가 그렇게 묻자 여씨가 들 한 모퉁이를 손가락질하며 일러주었다.


“저리로 갔는데,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이에 유계는 뛰듯이 따라가 그 늙은이를 붙잡고 자신의 관상도 봐주기를 청했다. 흠칫하고 발걸음을 멈춘 그 늙은이가 한참이나 유계를 뜯어보다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부인과 아이들의 관상을 보았는데 모두 매우 귀한 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귀함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더니, 이제 알겠습니다. 공은 말로 다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신 상입니다. 부인과 아이들의 귀함은 모두 공에게서 온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천하를 위해 자중하고 또 자중하십시오.”


유계는 전에 없이 섬뜩한 기분으로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두 어깨를 짓눌러 오는 천하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그 늙은이의 관상을 믿었다기보다는 자기에게 특별하게 요구되는 어떤 역할이 있음을 드디어 확인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하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 말씀대로라면 이렇게 일러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뒷날 귀하게 되면 반드시 어르신을 찾아 뵙겠습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예를 갖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전에는 노관이나 번쾌처럼 유별나게 가까이 지내거나, 소하나 조참처럼 무언가를 위해 애써 찾고있던 사람들만 내게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길 가던 사람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유계가 다시 그 늙은이를 떠올리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소리나게 열리며 한나절 보이지 않던 정보(亭父)가 뛰어 들어왔다.


“정장 나리, 정장 나리. 현청의 소 공조(蕭 功曹)께서 찾으십니다.”


소 공조라면 이제는 현에서 공조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는 소하를 이르는 말이었다. 소하가 자신을 찾는 일이 흔치는 않았으나,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디 있더냐?”


유계가 정보의 호들갑을 나무라는 뜻으로 목소리를 무겁게 하여 물었다. 정보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저기 - 저기 오십니다.”


현(縣)에서 가장 낮은 관리인 정장(亭長)을 상관으로 모셔야하는 번졸(番卒)인 정보에게는 현의 주리(主吏)인 소하가 아득하게 보일 법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