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ehouse/이문열 초한지

<8>초한지 卷一 / 2장 黃帝의 세계(4)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1. 12:25

주(周)나라의 시조 후직(后稷)도 황제의 자손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姜原)이 제곡의 정비(正妃)이니 은나라 시조인 설(契)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황제의 현손이 된다. 하지만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그를 임신했다는 탄생설화는 간적(簡狄)이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게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계(父系)혈통에 대한 의혹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후직은 태어난 뒤의 설화로 미루어 보면 제곡의 혈통, 곧 황제의 자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든다. 강원이 갓난 후직을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지나가고, 깊은 숲 속에 버리니 난데없이 사람들이 몰려와 구했으며, 얼음 위에 던져 두었더니 날짐승들이 깃털로 덮어 주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을 그렇게 버린 까닭을 별난 임신을 불길하게 여겨서라고 하나, 실은 수상쩍은 부계혈통이 준 부담이었던 듯하다. 후직의 이름이 기(棄)인 것은 그렇게 버림받은[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부모에게 거두어들여져 자란 후직은 농경에 능통하여 요임금 시절에 농사(農師)로 발탁되었다. 그때 붙여진 칭호가 후직이요, 받은 성은 희씨(姬氏), 땅은 태(邰)였다. 후직은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삼대에 걸쳐 농관(農官)으로 일하면서, 때맞춰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을 가르쳐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직이 죽자 아들 부줄(不K)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뒷날 하우씨의 자손들이 덕을 잃어 농관의 직책을 없애버리자 늙은 부줄은 일족을 이끌고 융적(戎狄)의 땅으로 달아났다. 그 뒤로 그 자손들은 오랑캐 땅에서 살게 되었으나, 황제의 핏줄은 역시 남달랐다. 부줄의 손자 공류(公劉)시절에 정교(政敎)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고, 그 아들 경절(慶節)은 도읍을 빈(뾓)에 정해 주나라의 기초를 더욱 튼튼히 했다.


그로부터 일곱 대(代)가 지나 고공단보(古公亶父)란 영걸이 나타났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류의 뜻을 이어 덕을 닦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우러르고 받들었다. 그걸 시기한 훈육(熏育〓뒷날의 흉노)과 융적이 싸움을 걸어오자 고공단보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살았다. 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은 채 그를 뒤따랐다.


고공단보는 백성들의 몸에 밴 오랑캐의 습속을 고치게 하고, 오관(五官)과 유사(有司)를 두어 나라의 틀을 갖추었다. 또 집을 짓고 성곽을 쌓게 하였으며, 고을을 나누어 백성들이 살게 하였다. 그때 그가 힘들여 개척한 지방이 주원(周原)이었으므로 주(周)라고 하는 나라이름이 처음 나왔다.


고공단보에게는 정실에게서 난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태백(太伯)이요, 둘째가 우중(虞仲)이며,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이 지임씨(摯任氏)의 딸인 태임(太任)을 맞아 아들 창(昌)을 낳을 적에 그 조짐이 비상하였다.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방안으로 날아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의 시절에 나라를 크게 일으킬 사람이 날 것이라 했는데, 바로 이 아이가 아닌가?”


고공단보가 기뻐하며 그렇게 말했다. 맏이 태백과 둘째 우중은 아버지가 조카 창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싶어함을 알자 함께 형만(荊蠻)의 땅으로 달아났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하여 오랑캐 사이에 숨어 삶으로써 왕위가 창에게 돌아갈 수 있게 했다.


고공단보가 죽자 주나라의 왕위는 계력을 거쳐 창에게 전해졌다. 뒷날 문왕(文王)으로 추존받게 되는 창은 후직과 공류, 고공단보의 업적을 이어받아 어진 정치를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또 ‘밥 한 그릇 먹을 동안 세 번이나 입안의 것을 뱉어야 할’ 정도로 어진 사람들을 맞아들이기에 정성을 다하니 천하의 재주 많고 덕 높은 선비들이 모두 창에게로 몰려들었다. 고죽국(孤竹國)에서 온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비롯하여 태전(太顚) 굉요(냃夭) 산의생(散宜生) 육자(쯳子) 신갑(辛甲) 같은 이들이 그랬다.


창의 세력이 나날이 불어가는 걸 본 숭후 호(崇侯 虎)가 은나라 주왕에게 모함했다.


“제후들이 모두 창에게로 기울어지니 이는 결코 대왕께 좋은 일이 못됩니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창을 불러들여 유리(줸里)에 가두었다. 굉요를 비롯한 창의 신하들이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족의 문마(文馬〓아름다운 준마), 유웅(有熊)족의 구사(九駟〓아홉대의 수레를 끌 수 있는 서른 여섯 마리의 말)를 다른 여러 보석들과 함께 바치며 풀어주기를 빌었다.


“미녀만으로도 창을 놓아 주기에 넉넉한데, 더하여 이렇게 많은 걸 바치다니!”


주왕이 기뻐 그렇게 말하며 창을 놓아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풀려난 뒤에는 땅까지 떼어 바치는 그를 서백(西伯)으로 높여 주변 제후국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


그 뒤 서백은 한편으로는 덕을 베풀고 한편으로는 힘으로 주변을 아우르며 더욱 세력을 키워나갔다. 풍읍(豊邑)을 세워 기산 아래에서 그리로 옮겨 앉았고, 할아버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아버지인 계력(季歷)을 왕계(王季)로 높여 부르게 했다.


서백이 쉰 해를 다스리다 죽자 그 아들 발(發)이 대를 이으니 그가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강상(姜尙)을 군사(軍師)로 삼고, 아우 주공(周公) 소공(召公) 필공(畢公) 등을 써서 아버지 문왕의 위업을 더욱 크게 떨쳐 나갔다. 그 중에서도 강상은 봉함 받은 땅을 성으로 써서 여상(呂尙)이라고도 하고 또 달리는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로, 서백이 위수(渭水)가에서 얻은 인재였다. 특히 군사를 부리는 데 뛰어났는데, 무왕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아버지처럼 받들어 사상보(師尙父)라 불렀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던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친 것은 왕위에 오른 지 열한 해 되던 때였다. 그해 2월 갑자일(甲子日) 동틀 무렵 싸움수레[戎車]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만 5000명을 이끌고 목야(牧野)의 들판에 이른 무왕은 군사들과 모여든 제후들에게 외쳤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지금 은왕(殷王) 주(紂)는 오직 계집[둼己]의 말만 듣고 선조의 제사를 끊었으며 나라를 어지럽혔소. 또한 친히 해야 할 사람은 쓰지 않고 오히려 죄 짓고 도망쳐온 자들을 높이고 믿으니, 그들은 백성들을 모질게 대하고 나라에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소. 지금 이 사람 발(發)은 그대들과 함께 다만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려 하오.”


그러자 그를 따르기로 맹세한 제후들의 싸움수레만도 4000대나 되었다.


은나라 주왕은 무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70만의 군대를 내어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이 떠났으니 군사들이 제대로 싸워줄 리 없었다. 무왕이 먼저 날랜 용사를 내어 싸움을 건 뒤에 대졸(大卒〓부대단위. 대략 戎車 350대에 군사 3만명 정도)을 몰아 들이치자 은나라의 군사들은 오히려 창칼을 저희 편에게 돌려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일이 글렀음을 안 주왕은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달기와 다른 애첩들도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뒤따라 성안으로 들어온 무왕은 그들의 시체를 목베어 크고 작은 기에 달게 한 뒤, 하늘에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은나라를 대신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무왕은 먼저 주왕의 학정과 악행를 모두 바로잡고, 다시 태공망과 주공을 비롯한 여러 공신과 형제들을 제후로 봉해 천하를 안정시켰다. 또 화산(華山) 남쪽에는 말을 놓아기르고 도림(桃林) 들판에는 소를 놓아기르게 하였으며,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군사를 흩어 다시는 무기와 군사를 쓰는 일이 없을 것임을 널리 알렸다.


무왕이 병들어 죽고 어린 아들 송(誦)이 뒤를 이어 성왕(成王)이 되자 주의 천하에 잠시 혼란이 일었다. 섭정을 맡게 된 주공(周公)의 두 아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꼬드겨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주공은 그 난을 진압하고 어린 성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쳐 주 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성왕에 이어 강왕(康王) 소왕(昭王) 목왕(穆王)을 거쳐 공왕(共王)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주나라 왕실의 위엄은 그럭저럭 이어져갔다. 그러나 공왕의 뒤를 이은 의왕(懿王)때가 되면 벌써 왕실을 풍자하는 시가 씌어지고 있다. 이어 의왕의 아우가 찬탈하여 효왕(孝王)이 되었다가 다시 의왕의 아들이 이왕(夷王)에 올라 왕통을 바로잡지만, 곧 여왕(싪王)이 나타난다.


여왕은 욕심 많고 표독스러운 영이공(榮夷公)을 대신으로 쓰고, 실정(失政)과 악행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 백성들의 입을 막았다. 예량부(芮良夫)와 소공(召公) 같은 충신들이 말렸으나 듣지 않다가 마침내는 ‘공화(共和)’란 특이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공화는 여왕이 성난 백성들에게 쫓겨 체(쵲)땅에 숨어사는 14년 동안 소공과 주공(周公〓성왕 때의 주공과는 다른 인물) 두 재상이 임금 없이 나라를 다스린 일을 말한다. 뒷날 공화국(共和國)이나 공화정(共和政)의 어원이 된 사건이다.


여왕이 죽고 소공의 집에서 자란 태자가 왕위에 올라 선왕(宣王)이 되지만 주 왕실의 운세는 별로 회복되지 못했다. 선왕은 내치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외정(外政)에도 서툴러 오랑캐인 강(姜)과 싸우다가 크게 졌다. 그러고도 호구(戶口)를 헤아리는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더니 아들 궁생(宮生)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궁생이 왕위에 올라 유왕(幽王)이 되었는데, 비록 나라까지 잃지는 않았지만 유왕은 하나라 걸왕(桀王)이나 은나라 주왕(紂王)에 못지않은 폭군으로 널리 이름을 얻었다. 지진이 일고 강물이 말라도 삼갈 줄 모르고, 괵석보(냀石父)란 간신을 무겁게 써서 백성들을 쥐어짜게 했다. 거기다가 포사(褒뾠)란 여인을 총애하여 나랏일을 더욱 그르쳤다.


포사가 잘 웃지 않자 유왕은 여러 가지로 그녀를 웃겨보려 했다. 한번은 적군이 오지 않는데도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두들기게 하였는데, 놀란 제후들이 모두 달려와 허탕을 치는 걸 보고 드디어 포사가 웃었다. 그러자 유왕은 기뻐하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쳐 포사를 웃겼다.


포사가 백복(伯服)을 낳자 유왕은 신후(申侯)의 딸인 왕후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성난 신후는 증(繒)나라 및 견융(犬戎)과 손잡고 유왕을 쳤다. 유왕은 급히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치게 하였으나 여러 번 속은 제후들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여산(驪山) 아래에서 견융에게 잡혀 죽고 주 왕실의 재물은 모두 노략질당했다.


원래 태자였던 의구가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견융을 피해 도성을 낙읍(洛邑)으로 옮기고 나라를 되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뜻 같지가 못했다. 제후들 가운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아우르기 시작했고 대권은 세력 있는 방백(方伯)에게로 넘어갔다. 이른바 ‘춘추(春秋)’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오제(五帝) 삼대(三代〓夏 殷 周)를 이어온 황제의 세계도 서서히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