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 /김시습(金時習)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
(이생이 담장을 엿본 이야기)-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것과, 김집(金集)의 수택본 한문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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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都有李生者 송도에 이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居駱駝橋之側 낙타교 옆에 살고 있었다.
年十八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風韻淸邁 天資英秀 풍운이 맑고 재주가 뛰어나
常詣國學 讀詩路傍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 가에서도 시를 읽었다.
善竹里 有巨室處崔氏 선죽리 귀족 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年可十五六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態度艶麗 工於刺繡 자태가 아리땁고 수도 잘 놓았으며,
而長於詩賦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世稱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風流李氏子 풍류로운 이씨 집안 총각이요
窈窕崔家娘 아리따운 최씨 집안 처녀로다
才色若可餐 그 재주와 그 미모 진수성찬 같으니
可以療飢腸 주린를 채울 수 있겠네.
李生嘗挾冊詣學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常過崔氏之家北牆外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垂楊裊裊數十株環列 간들거리는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李生憩於其下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一日窺牆內 어느 날 담 안을 엿보았더니,
名花盛開蜂鳥爭喧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傍有小樓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隱映於花叢之間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株簾半掩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羅幃低垂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有一美人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倦繡停針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支頤而吟曰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獨倚紗窓刺繡遲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百花叢裏囀黃鸝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無端暗結東風怨 부질없이 마음속으로 봄바람을 원망하며
不語停針有所思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路上誰家白面郞 저 길 위의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靑衿大帶映垂楊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何方可化堂中燕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低掠珠簾斜度墻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生聞之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不勝技癢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然其門戶高峻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庭闈深邃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但怏怏而去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還時以白紙一幅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作詩三首 시 세 수를 써서
繫瓦礫投之曰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은. 그 시에 말하였다.
巫山六六霧重回 “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굽어도는데
半露尖峰紫翠堆 반쯤 드러난 뽀죽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惱却襄王孤枕夢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肯爲雲雨下陽臺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相如欲挑卓文君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多少情懷已十分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紅粉墻頭桃李艶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隨風何處落繽紛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好因緣邪惡因緣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空把愁腸日抵年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二十八字媒已就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藍橋何日遇神仙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崔氏 命侍婢香兒 최씨가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往取見之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卽李生詩也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披讀再三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心自喜之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고는.
以片簡 又書八字 이에 종이 쪽지에 여덟 자를 써서
投之曰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거기에 써있는 말,
將子無疑 "님이시여. 의심 마시고.
昏以爲期 황혼에 만나기로 약속 합시다."
生如其言 乘昏而往 이생이 그 말대로 황혼을 틈타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忽見桃花一枝過墻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담 위로 넘어오면서
而有搖裊之影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往視之則以鞦韆絨索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네줄이
繫竹兜下垂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生攀緣而踰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會月上東山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花影在地 淸香可愛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生意謂已入仙境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心雖竊喜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而情密事秘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毛髮盡竪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回眄左右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女已在花叢裏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與香兒 折花相戴 향아와 같이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鋪罽僻地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見生微笑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口占二句 先唱曰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桃李枝間花富貴 “복사와 오얏 가지 사이로 꽃송이 탐스럽고
鴛鴦枕上月嬋娟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生續吟曰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他時漏洩春消息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風雨無情亦可憐 비바람 무정하니 더욱 가련하리라.“
女變色而言曰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本欲與君 終奉箕帚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永結歡娛 "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郞何言之若是遽也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妾雖女類 心意泰然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丈夫意氣 肯作此語乎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他日閨中事洩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親庭譴責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妾以身當之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香兒可於房中 향아야. 방 안에서
賫酒果以進 "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兒如命而往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四座寂寥 闃無人聲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生問曰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此是何處 " 이곳은 어디입니까?"
女曰 최랑이 말하였다.
此是北園中小樓下也 "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父母以我一女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情鍾甚篤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別構此樓于芙蓉池畔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方春時 名花盛開 봄이 되어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欲使從侍兒遨遊耳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親闈之居 閨閤深邃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멀기 때문에
雖笑語啞咿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亦不能卒爾相聞也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女酌綠蟻一巵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이생에게 권하면서
口占古風一篇曰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曲欄下壓芙蓉池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池上花叢人共語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香霧霏霏春融融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製出新詞歌白紵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月轉花陰入氍毹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共挽長條落紅雨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風攪淸香香襲衣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賈女初踏春陽舞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羅衫輕拂海棠枝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驚起花間宿鸚鵡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生卽和之曰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誤入桃源花爛熳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多少情懷不能語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翠鬟雙綰金Ꟃ低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楚楚春衫裁綠紵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東風初拆竝帶花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莫使繁枝戰風雨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飄飄仙袂影婆婆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叢桂陰中素娥舞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미녀가 춤을 춘다
勝事未了愁必隨 좋은 일이 끝나지 않아도 시름이 따를 테니
莫製新詞敎鸚鵡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吟罷 女謂生曰 술자리가 끝나자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今日之事 必非小緣 "오늘의 일은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郞須尾我 以遂情款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言訖 女從北窓入 말을 마치고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生隨之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이생규정전(2)
樓梯在房中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綠梯而昇 果其樓也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文房几案 極其濟楚 문방구와 책상들이 아주 말끔했으며,
一壁展煙江疊嶂圖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圖)」와
幽篁古木圖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皆名畵也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題詩其上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詩不知何人所作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其一曰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何人筆端有餘力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寫此江心千疊山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壯哉方壺三萬丈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은
半出縹緲烟雲間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遠勢微茫幾百里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近見崒嵂靑螺鬟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滄波淼淼浮遠空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日暮遙望愁鄕關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對此令人意蕭索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疑泛湘江風雨灣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其二曰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幽篁蕭颯如有聲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古木偃蹇如有情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狂根盤屈惹苺苔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老幹夭矯排風雷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胸中自有造化窟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妙處豈與傍人說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韋偃與可已爲鬼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漏洩天機知有幾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晴窓嗒然淡相對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愛看幻墨神三昧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一壁貼四時景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各四首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亦不知爲何人所作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其筆 則摹松雪眞字 그 글씨는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體極精姸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其一幅曰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芙蓉帳暖香如縷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窓外霏霏紅杏雨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樓頭殘夢五更鐘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百舌啼在辛夷塢 개나리 무성한 둑에 때까치가 우짖네.
燕子日長閨閤深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懶來無語停金針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花底雙雙飛蝶蛺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爭趰落花庭院陰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嫩寒輕透綠羅裳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空對春風暗斷腸 무정한 봄바람에 이 내 간장 끊어지네.
脉脉此情誰料得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百花叢裏舞鴛鴦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春色深藏黃四家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深紅淺綠映窓紗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一庭芳草春心苦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輕揭珠簾看落花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其二幅曰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小麥初胎乳燕斜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南園開遍石榴花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綠窓工女幷刀饗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擬試紅裙剪紫霞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黃梅時節雨簾纖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鸎囀槐陰燕入簾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又是一年風景老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棟花零落笋生尖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手拈靑杏打鸎兒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風過南軒日影遲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荷葉已香池水滿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碧波深處浴鸕鶿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원앙새가 목욕하네.
藤牀筠簟浪波紋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屛畵瀟湘一抹雲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懶慢不堪醒午夢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半窓斜日欲西曛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其三幅曰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秋風策策秋露凝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秋月娟娟秋水碧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一聲二聲鴻雁歸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更聽金井梧桐葉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床下百蟲鳴喞喞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床上佳人珠淚滴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良人萬里事征戰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今夜玉門關月白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新衣欲裁剪刀冷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低喚丫兒呼熨斗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熨斗火銷全未省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細撥秦箏又搔首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小池荷盡芭蕉黃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鴛鴦瓦上粘新霜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舊愁新恨不能禁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況聞蟋蟀鳴洞房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其四幅曰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一枝梅影向窓橫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風緊西廊月色明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爐火未銷金筋撥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旋呼丫髻換茶鐺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林葉頻驚半夜霜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回風飄雪入長廊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無端一夜相思夢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都在氷河古戰場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滿窓紅日似春溫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愁鎖眉峰著睡痕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膽甁小梅腮半吐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含羞不語繡雙鴛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剪剪霜風掠北林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寒鳥啼月正關心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燈前爲有思人淚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滴在穿絲小挫針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一傍 別有小室一區 한쪽에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帳褥衾枕 亦甚整麗 휘장 . 요 . 이불 .베개들이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帳外爇麝臍 燃蘭膏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熒煌映徹 恍如白晝 환하게 밝아서 마치 대낮 같았다.
生與女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極其情歡 遂留數日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러 날 머물었다.
生謂女曰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先聖有言 "옛 성인의 말씀에,
父母在 '어버이가 계시면
遊必有方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而今我定省 已過三日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사흘이나 되었소.
親必倚閭而望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非人子之道也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女惻然而頷之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踰垣而遣之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生自是以後 이생은 이 뒤부터
無已不往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一夕 李生之父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가
問曰 이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汝朝出而暮還者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將以學先聖仁義之格言 옛 성인의 어질고 의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昏出而曉還 그런데 요즘은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니,
當爲何事 이게 어찌 된 일이냐?
必作輕薄子 반드시 경박한 놈들의 행실을 배워
踰垣牆 折樹壇耳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아가씨나 엿보고 다닐게다.
事如彰露 이런 일이 만일 탄로되면
人皆譴我 남들은 모두 나를 책망하되
敎子之不嚴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而如其女 또 그 처녀도
定是高門右族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라면
則必以爾之狂狡 반드시 네 미친 짓 떄문에
穢彼門戶 그 집안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獲戾人家 남의 집에 죄를 지었으니,
其事不小 이 일이 작지 않다.
速去嶺南 너는 빨리 영남으로 내려가서
率奴隷監農 종들을 데리고 농사나 감독하거라.
勿得復還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卽於翌日 그 이튿날 이생의 아버지가
謫送蔚州 이생을 울주로 내려보냈다.
女每夕 최랑은 저녁마다
於花園待之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지만,
數月不還 여러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女意其得病 최랑은 이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命香兒 향아를 시켜
密問於李生之鄰 이생의 이웃들에게 물래 물어 보게 하였다.
鄰人曰 이웃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李郞 得罪於家君 "이도령은 그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去嶺南 已數月矣 영남으로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나 되었다오."
女聞之 최랑은 이 소식을 듣고
臥疾在床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轉轉不起 엎치락뒤치락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水醬不入於口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
言語支離 말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肌膚憔悴 얼굴이 초췌해졌다.
父母怪之 최랑의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問其病狀 그 병의 증상을 물었지만,
喑喑不言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搜其箱篋 딸의 상자 속을 들추어보았더니,
得李生前日唱和詩 이생과 지난날에 주고받은 시들이 있었다.
擊節驚訝曰 최랑의 부모들이 그제야 놀라서 무릎을 치며 말하였다.
幾乎失我女子矣 "어이구. 우리 딸자식을 잃어버릴 뻔했구려."
問曰 李生誰耶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이생이 누구냐?"
至是 女不能復隱 이렇게 되자 최랑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細語在咽中 목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告父母曰 부모에게 아뢰었다.
父親母親 鞠育恩深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가 깊으니,
不能相匿 어찌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竊念男女相感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人情至重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是以 摽梅迨吉 그러므로 '결혼할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말은
咏於周南" 『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에도 나타나고,
咸腓之凶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은
刑於羲易 『주역(周易)』에서도 경계하였습니다.
自將蒲柳之質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몸으로
不念桑落之詩 얼굴빛이 시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서
行露沾衣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竊被傍人之嗤 옆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絲蘿托木 새삼 덩굴이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已作渭兒之行 저는 벌써 위당(渭塘)의 처녀 노릇을 가게 되었으니,
罪已貫盈 죄가 이미 가득 차
累及門戶 집안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然而彼狡童兮 그러나 저 아름다운 도련님과
一偸賈香 한 번 정을 통한 뒤부터는
千生喬怨 도련님께 대한 원망이 천만 번 생기게 되었습니다.
以眇眇之弱軀 연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忍悄悄之獨處 참으며 홀로 살아가려니,
情念日深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沈痾日篤 아픈 상처를 나날이 더해 가서
濱於死地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將化窮鬼 이제는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化)해 버릴 것 같습니다.
父母如從我願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終保餘生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倘違情款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斃而有已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當與李生 重遊黃壞之下 이생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노닐지언정,
誓不登他門也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오르지 않겠습니다.
於是 父母已知其志 그러자 부모도 이미 그의 뜻을 알았으므로
不復問病 다시는 병의 증세를 묻지 않았다.
且警且誘 타이르고 달래면서
以寬其心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復修媒妁之禮 그리고는 중매쟁이의 예를 갖추어
問于李家 이생의 집으로 보냈다.
李氏 이생의 아버지가
問崔家門戶優劣曰 최씨 집안이 얼마나 번성한지 물은 뒤에 말하였다.
吾家豚犬 雖年少風狂 "우리 집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났지만,
學問精通 身彩似人 학문에 정통하고 사람답게 생겼소.
所冀捷龍頭於異日 앞으로 장원급제할 것이며
占鳳鳴於他年 훗날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니,
不願速求婚媾也 서둘러 혼처를 정하고 싶지 않소."
媒者 以言返告 중매장이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崔氏復遣曰 최씨가 다시 중매인을 이씨 집으로 보내어 말하게 하였다.
一時朋伴 皆稱 "한 시대의 친구들이 모두들 칭찬하였습니다.
令嗣才華邁人 '그 댁의 영식(令息)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다'라고
今雖蟠屈 아직은 또아리를 틀고 있지만,
豈是池中之物 어찌 끝까지 연못 속에 잠겨만 있겠습니까?
宜速定嘉會之晨 빨리 혼삿날을 정해
以合二姓之好 두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媒者 又以其言 중매쟁이가 또 그 말을
返告李生之父 돌아가서 이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였더니,
父曰 吾亦自少 이생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把冊窮經 책을 잡고 학문을 닦았지만,
年老無成 나이 늙도록 성공하지 못하였소.
奴僕逋逃 親戚寡助 종들도 흩어지고 친척의 도움도 적어,
生涯疎闊 家計伶俜 생업이 신통치 않고 살림도 궁색해졌소.
而況巨家大族 그러니 문벌 좋고 번성한 집안에서
豈以一人寒儒 어찌 한갓 빈한한 선비를
留意爲贅郞乎 사위로 삼으려 하시겠소?
是必好事者 이는 반드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過譽吾家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칭찬해서
以誣高門也 귀댁을 속이려는 것일 거요."
媒又告崔家 중매쟁이가 돌아와서 또 최씨 집안에 전하자.
崔家曰 최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納采之禮 漿束之事 예물 드리는 모든 절차와 옷차림은
吾盡辨矣 모두 저희 집에서 갖추겠습니다.
宜差穀旦 좋은 날을 가려서
以定花燭之期 화촉의 시기만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媒者 又返告之 중매쟁이가 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李家至是 稍回其意 이씨 집안에서도 이렇게까지 되자 뜻을 돌려,
卽遣人 召生問之 곧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다 그의 생각을 물었다.
生喜不自勝 이생을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乃作詩曰 곧 시 한 수를 지었다.
破鏡重圓會有時 깨어진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니 만남도 때가 있어
天津烏鵲助佳期 은하의 까마귀와 까치들이아름다움 기약을 도와주었네.
從今月老纏繩去 이제야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붉은 실을 잡아매었으니
莫向東風怨子規 봄바람이 건듯 불더라도 소쩍새를 원망 마소.
女聞之 病亦稍愈 최랑이 이 시를 듣고는 병도 차츰 나아져,
又作詩曰 자기도 시를 지었다.
惡因緣是好因緣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던가?
盟語終須到底圓 그 옛날 맹세가 마침내 이루어졌네.
共輓鹿車何日是 어느 때나 님과 함께 작은 수레를 끌고 갈까?
倩人扶起理花鈿 아이야, 나를 일으켜 다오 꽃비녀를 손질하련다.
於是 擇吉日 이에 좋은 날을 가려
遂定婚禮 마침내 혼례를 이루니,
而續其絃焉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自同牢之後 그들은 부부가 된 이후에
夫婦愛而敬之 서로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여
相待如賓 마치 손님처럼 대하니,
雖鴻光鮑桓 비록 양홍 맹광이나 포선(鮑宣).환소군(桓少君)이라도
不足言其節義也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生翌年 捷高科 이생이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登顯仕 높은 벼슬에 오르자,
聲價聞于朝著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辛丑年 신축년(1361)에
紅賊據京城 홍건적이 서울을 점거하자
王移福州 임금은 복주(福州)로 피난 갔다.
賊焚蕩室廬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며,
臠炙人畜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夫婦親戚 부부와 친척끼리도
不能相保 서로 보호하지 못했고
東奔西竄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各自逃生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生挈家 이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隱匿窮崖 외진 산골로 숨었는데,
有一賊 拔劍而逐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뒤를 쫓아왔다.
生奔走得脫 이생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女爲賊所虜 최랑은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欲逼之 도적이 최랑의 정조를 빼앗으려 하자,
女大罵曰 최랑이 크게 꾸짖었다.
虎鬼殺啗我 "창귀같은 놈아. 나를 죽여 먹어라.
寧死葬於豺狼之腹中 내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의 밥이 될지언정
安能作狗彘之匹乎 어찌 개돼지 같은 놈의 짝이 되겠느냐?"
賊怒 殺而剮之 도적이 노하여 최랑을 죽이고 살을 도려내었다.
生竄于荒野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僅保餘軀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聞賊已滅 도적이 이미 다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遂尋父母舊居 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其家已爲兵火所焚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싸움 통에 불타 없어졌다.
又至女家 또 최랑의 집에도 가보았더니
廊廡荒凉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鼠喞鳥喧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悲不自勝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登于小樓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서
收淚長噓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奄至日暮 날이 저물도록
塊然獨坐 우두커니 홀로 앉아
佇思前遊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宛如一夢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將及二更 이경쯤 되자 달빛이
月色微吐 흐릿하게 토하여
光照屋梁 빛이 들보를 비추는데
漸聞廊下有跫然之音 낭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自遠而近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至則崔氏也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生雖知已死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愛之甚篤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不復疑訝 의심하지도 않고
遽問曰 급히 물어 보았다.
避於何處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全其軀命 목숨을 보전하였소?"
女執生手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慟哭一聲 한바탕 통곡하더니,
乃敍情曰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妾本良族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幼承庭訓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工刺繡裁縫之事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學詩書仁義之方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但識閨門之治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뿐이지,
豈解境外之修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然而一窺紅杏之墻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自獻碧海之珠 제가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친 거지요.
花前一笑 꽃 앞에서 한번 웃고
恩結平生 평생의 가약을 맺었고,
帳裏重遘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情愈百年 정이 백년을 넘쳤었지요.
言至於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悲慙曷勝 슬프고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將謂偕老而歸居 장차 백년을 함께 하자고 하였는데,
豈意橫折而顚溝 뜻밖에 횡액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 어찌 알았겠어요?
終不委身於豺虎 늑대 같은 놈들에게 끝까지 정조를 잃치는 않았지만,
自取磔肉於泥沙 제 몸은 진흙탕에서 찢겨졌답니다.
固天性之自然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匪人情之可忍 인정으로야 어찌 그럴 수 있었겠어요?
却恨一別於窮崖 저는 당신과 외딴 산골에서 헤어진 뒤에
竟作分飛之匹鳥 짝 잃은 새가 되었었지요.
家亡親沒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傷殢魄之無依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義重命輕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幸殘軀之免辱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요.
誰憐寸寸之灰心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누가 불쌍히 여기겠어요
徒結斷斷之腐腸 한갓 애끊는 썩은 창자에만 맺혀 있을 뿐이지요.
骨骸暴野 肝膽塗地 해골은 들판에 내던져졌고 간담은 땅바닥에 널려졌으니,
細料昔時之歡娛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適爲當日之愁寃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군요.
今則鄒律已吹於幽谷 이제 봄바람이 깊은 골짜기에 불어오기에,
倩女再返於陽閒 저도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蓬萊一紀之約綢繆 봉래산 십이년의 약속이 얽혀 있고
聚窟三生之香芬郁 삼세(三世)의 향이 향그러우니,
重契闊於此時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期不負乎前盟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如或不忘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終以爲好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李郞其許之乎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生喜且感曰 이생이 기쁘고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固所願也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相與款曲抒情 그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言及家産被寇掠有無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女曰 一分不失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埋於某山某谷也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又問 이생이 또 물었다.
兩家父母骸骨安在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女曰 暴棄某處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 두었지요."
敍情罷 정겨운 이야기를 끝낸 뒤에
同寢極歡如昔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明日 이튿날
與生俱往尋瘞處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자기가 묻혀 있던 곳을 찾아갔는데,
果得金銀數錠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及財物若干 재물도 약간 있었다.
又得收拾兩家父母骸骨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貿金賣財 금과 재물을 팔아
各合葬於五冠山麓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封樹祭獻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皆盡其禮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其後 그 뒤에
生亦不求仕官 이생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고
與崔氏居焉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幹僕之逃生者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亦自來赴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生自是以後 이생은 이때부터
懶於人事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雖親戚賓客賀弔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杜門不出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常與崔氏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或酬或和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琴瑟偕和 금실 좋게 지내었다.
荏苒數年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一夕 어느 날 저녁에
女謂生曰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三遇佳期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世事蹉跎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歡娛不厭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哀別遽至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遂嗚咽 여인이 목메어 울자
生驚問曰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何故至此 "어찌 이렇게 되었소?"
女曰 여인이 대답하였다.
冥數不可躱也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天帝以妾與生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緣分未斷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又無罪障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假以幻體 이 몸을 환생시켜
與生暫割愁腸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非久留人世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以惑陽人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命婢兒進酒 그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歌玉樓春一闋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以侑生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歌曰 노래는 이러했다
干戈滿目交揮處 칼과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玉碎花飛鴛失侶 옥 부서지고 꽃 떨어지니 원앙도 짝을 잃었네.
殘骸狼籍竟誰埋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血汚遊魂無與語 에 젖어 떠도는 혼이 하소연할 곳도 없었네.
高唐一下巫山女 무산의 선녀가 고당에 한번 내려온 뒤에
破鏡重分心慘楚 깨어진 종(鐘)이 거듭 갈라지니 마음 더욱 쓰라려라.
從玆一別兩茫茫 이제 한번 작별하면 둘이 서로 아득해질 테니
天上人間音信阻 하늘과 인간세상 사이에 소식마저 막히리라.
每歌一聲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마다
飮泣數下 눈물이 자꾸 흘러 내려
殆不成腔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生亦悽惋不已曰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寧與娘子 同入九泉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황천(荒天)으로 갈지언정
豈可無聊獨保殘生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向者 傷亂之後 난 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親戚僮僕 各相亂離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亡親骸 狼籍原野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버려져 있었는데,
儻非娘子 誰能奠埋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古人云 生事之以禮 옛 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死葬之以禮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지내라' 하셨는데,
盡在娘子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天性之純孝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人情之篤厚也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感激無已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自愧可勝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
願娘子 淹留人世 원하기는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百年之後 同作塵土 백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女曰 여인이 말하였다.
李郞之壽剩有餘紀 "당신의 목숨은 아직 남아 있지만,
妾已載鬼籙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冥府)에 실려 있답니다.
不能久視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若固眷戀人間 제가 굳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違犯條令 명부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非唯罪我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兼亦累及於君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但妾之遺骸 散於某處 저의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倘若垂恩 만약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면
勿暴風日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주세요."
相視泣下數行云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李郞珍重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言訖漸滅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了無踪迹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生拾骨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附葬于親墓傍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旣葬 장사를 지낸 뒤에는
生亦以追念之故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得病數月而卒 병을 얻어,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聞者莫不傷歎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而慕其義焉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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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지금의 개성)에 사는 이생은 글공부를 하러 다니던 길에 최씨 처녀와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부모의 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혼인을 하여 행복을 누리나, 홍건적의 난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고 최씨녀는 홍건적에게 겁탈당하지 않으려다 죽어 이생만 살아남게 된다.
슬픔에 잠겨 있는 이생 앞에 최씨녀의 환신이 나타나는데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난 기쁨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다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최씨녀는 인연이 끝났다면서 저승으로 떠나고 이생은 최씨녀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준 뒤 병을 얻어 죽는다.
죽은 자와의 사랑은 전기성을 띠기 보다는 현실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성격을 갖는다.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현실의 비극을 강렬하게 고발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