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의 샘/ Classic

슈만 - 피아노 5중주 Eb장조 작품 44

늘푸른 봄날처럼 2018. 12. 29. 17:07


Schumann Robert, 1810~ 1856
Piano Quintet in E flat major, op.44
피아노 5중주 Eb장조, 작품44
Fitzwilliam String Quartet
Richard Burnett, Piano

    - Allegro Brillante (8;58) - Un Poco Largamente (8;34) - Scherzo: Molto Vivace (5;08) - Allegro, Ma Non Troppo (7;29) 수많은 고통과 질곡을 안고 대망하던 클라라와의 결합이 실현되던1840년 슈만은 도합 138곡의 예술가곡을 썼다. 이 응집성은 슈베르트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슈베르트의 가곡 작곡에는 열정과 함께한 자연스러움이 있다면, 슈만의 작곡에는 고통과 함께한 집념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고통과 집념은 계속 이어져, 가곡 상상력이 소진 된 뒤에 관현악에 몰두하고, 이 교향곡의 시기가 끝나면 곧바로 실내악 시기로 몰입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분명 베토벤의 현악 4중주들이었으리라. 그는 베토벤의 작품을 ‘세상이 거의 알지 못하는, 캐어내는 데만도 수 년이 걸릴 보물’이라고 표현 했다. 그는 1842년 6월 2일부터 7월 22일 사이에 세 개의 현악4중주를 스케치하고 완성했다. 그리고 곧이어 1842년 9월 피아노 5중주 op.44 를 썼다 이 열정과 집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슈만은 자신이 예술가면서 이제 곧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미치기 전에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조직적으로 완수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기의 최고의 걸작은 단연 피아노 5중주이다. 이 작품은 서두에 마치 “고통은 오히려 평안한 안식처”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피아노는 이 명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렇게 피아노가 명제를 공간화 하고 객관화 하면서 동시에 급속화 시키고 또한 악화시킨다. 이곡은 고통 속에서 오히려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슈만의 자화상이다. 그가 말했듯이, 마치 객관적 자아가 주관적 자아로부터 분리되는 것처럼, 아니면 인격적으로 외관과 진정한 자아 사이, 형식과 그림자 사이 균열을 겪는 것처럼 혼란과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승화시키려는 처절한 아름다움이 절절이 배어있는 그의 절규이다. "각 작품은 세부항목과 총체 양면에서 시적인 깊이와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것은 희귀한 정신의 상태를 드러내고 또 우리를 초자연적인 예술의 세계로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려야 한다.” 그의 유명한 음악미학이 바로 이 작품에서 온전하게 형상화 하고 있고, 그러므로 “고통은 오히려 평안한 안식처”라는 명제는 더욱 심화한다. 그 모든 것을 객관화하는 피아노, 그에게 피아노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바로 앞 세대 쇼팽과 리스트에 자극받아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과도한 손가락 훈련으로 오른손에 마비가 왔고 그렇게 작곡가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할지라도 과연 그에게도 그랬을까? 1833년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를썼다. “내 손가락은 걱정 마세요! 저는 상관없이 작곡을 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가 됐다고 해서 더 행복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일은 처음부터 틀어졌던 겁니다. 그건 저의 환상행위를 전혀 방해하지 않아요. 아니 그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음악의 환상을 펼칠 용기가 생기기도 했거든요” 그러나 슈만의 음악에서 피아노는 단지 환상을 펼치는 용기만은 아니었다. 피아노는 그의 음악의 숙명이었고, 그의 음악은 언제나 피아노를 바탕으로 혹은 배경으로 그리고 추동력으로 쓰여 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피아노의 순정하고 단아한 음세계로 쓰는 다채로운 실내악, 그리고 모든 악기의 총체인 교향악들 일체가 드디어 음악적으로 “고통은 오히려 평안한 안식처”라는 명제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슈만에게 ‘피아노’는 태아 상태로 죽은 일란성쌍둥이 중 한명과 같다. 이것이 그의 음악의 일생이며 광기의 일생이며 행복과 고통의 일생이다. 우리는 그 생애가 응집된 광경을, 연주시간 30분이 채 못 되는 ‘피아노 5중주 op.44’에서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절절이 느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