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탐진 최씨(耽津 崔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6. 10. 05:23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탐진 최씨(耽津 崔氏)  
    
    ■ 전라남도 강진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이다.
    ◎관향 -전라남도 강진군 (옛 지명 : 탐진현)
    ◎시조 -최사전 (崔思全)
    ◎주요 집성촌 -광주광역시 -경기도 화성시 -충청남도 예산군 -충청남도 청양군 
    경상남도 함양군-전라북도 군산시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담양군 -전라남도 강진군
    ◎주요 인물 -최부, 최정기, 최성
    ◎인구(2000년) -68,127명 (110위
    ● 시조
    탐진최씨(耽津崔氏)의 始祖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인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 본관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靈巖)에 속하였다가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쳐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
    ● 과거 급제자
    탐진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과 -최상(崔尙)
    문과 
    최병룡(崔炳龍) 최부(崔溥) 최사물(崔四勿) 최신(崔信) 최재철(崔在澈) 최홍전(崔弘甸)
    무과 
    최귀석(崔貴碩) 최길선(崔吉善) 최대립(崔大立) 최대영(崔大英) 최대항(崔大恒) 최덕립(崔德立) 
    최덕보(崔德福) 최덕보(崔德福) 최덕중(崔德重) 최덕훈(崔德勳) 최동문(崔東文) 최두극(崔斗極) 
    최발(崔) 최복원(崔復原) 최빈(崔濱) 최상륜(崔尙崙) 최상악(崔相岳) 최석륜(崔碩崙) 
    최선립(崔善立) 최세기(崔世機) 최세익(崔世益) 최수천(崔壽天) 최승현(崔承賢) 최여곤(崔汝崑) 
    최여준(崔汝峻) 최여태(崔如台) 최영걸(崔英傑) 최용(崔勇) 최원립(崔元立) 최유림(崔有霖) 
    최지천(崔至天) 최진익(崔振翼) 최찬경(崔纘慶) 최창술(崔昌述) 최충신(崔忠信) 최치운(崔致雲) 
    최탁(崔琢) 최태제(崔泰齊) 최필영(崔弼榮) 최한(崔漢) 최호중(崔好重) 최화제(崔華齊) 
    최후립(崔厚立) 최후진(崔厚鎭)
    생원시 
    최경기(崔景驥) 최대현(崔大顯) 최부(崔溥) 최석춘(崔錫春) 최억첨(崔億瞻) 최언호(崔彦虎) 
    최익중(崔翼中) 최정연(崔挺然) 최준학(崔儁學) 최직량(崔直良) 최청(崔淸) 최치영(崔致永) 
    최태주(崔台柱) 최화(崔俰)
    진사시 
    최극충(崔克忠) 최기룡(崔基龍) 최기종(崔起宗) 최덕준(崔德峻) 최명호(崔明濠) 
    최병칠(崔炳七) 최부(崔溥) 최삼성(崔三省) 최영(崔渶) 최윤식(崔允湜) 최윤형(崔閏亨) 
    최응두(崔應斗) 최재철(崔在澈) 최주(崔澍) 최택(崔澤) 최학령(崔鶴齡)
    ● 해주 최씨와의 관계
    탐진 최씨는 장경공 최사전의 선대를 모르던 1921년까지는 장경공이 해주 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고 왔으나 개성 장미산에 있던 장경공의 묘소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고 
    묘지명(墓誌銘)이 발현함으로써 해주 최씨 분파설은 효력을 상실하였다. 
    장경공의 조부는 상약국직장 최철, 부친은 장작감 최정이며 모두 의술로 고려 조정에 
    입사하였다고 한다. 그 선조는 탐진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其先耽津縣人也) 
    이것으로 볼때 최사전의 선조부터 탐진에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탐진백(조선과환보 인용)에 봉해지면서 탐진최씨의 시조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경공 최사전의 묘지명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탐진최씨는
    1985년에는 총 14,609가구 61,841명, 
    2000년에는 총 21,191가구 68,12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