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개혁정국「환상의 복식조」- 정조와 채제공 (2) 늘푸른 봄날처럼 2019. 6. 10. 04:12 ■ 정조와 채제공 한편, 채제공 독상정부 하에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던 영남의 남인은, 정조 16년(1792년) 경상도 유학 이우 등을 앞세워 1만 57인의 연명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처단하는 일이야 말로 선대왕(영조)의 본심을 받드는 것이라며 이들의 정계 축출을 요구하였다. 영남 사대부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문이라 하여 ‘영남만인소(萬人疏)’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4월에 있었던 노론 유성한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에는 참석하지 않고 유흥(국왕의 능행)만 즐겨 여악들이 금원에까지 들어오고 광대가 대가 앞에 외람되이 접근했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오히려 이 행차를 즐기는 편이었고,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소하는 기회로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한의 상소는 사실을 왜곡하였다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종의 능 앞을 지나며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로서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윤구종 사건과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유성한의 상소에 영남 사대부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한 사건이 영남만인소였던 것이다. 영남만인소는 무인년(영조 34년) 이후 5년 동안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들이 사도세자에게 저지른 갖가지 만행과 영조 말 척신당 세력이 세손시절 정조에게 저지른 갖가지 만행을 싸잡아 비난하고 영남인들의 임금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다음,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유성한)가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을 미친 것(윤구종)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빨리 노적의 율을 사용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달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정조는 자신의 지지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상소를 이우로 하여금 소리 내어 읽게 하였고, 이우가 상소문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하였다. 이런 목메임을 여러 차례 되풀이 한 뒤에야 정조는 겨우 입을 열어 김상로와 숙의 문씨, 홍인한, 홍계희 등을 치죄한 사실과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영조와의 약속 등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을 타일러 영남으로 내려 보냈다. 이를테면 ‘부자의 윤리’(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군신의 윤리’(영조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조의 이러한 반응은 집권 초 영남 유생 이응원이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들의 처단을 요구하였을 때 보였던 반응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당시 정조는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로 처단했었는데,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 난처한 문제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어 밝힐 수는 없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반응을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대표격인 이우를 의릉(경종의 묘) 참봉자리에 앉힘으로써 영남만인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하였다. 임금의 변화된 태도를 감지한 영남 유생들은 그 열흘 후 1차 상소 때보다 311명이 더 많은 1만 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를 재차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조는, 1차 상소 때 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을 고무시켰다. 즉, 사도세자 사건을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로 부각시키는 한편 “부자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군신간의 분의(分義)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영남만인소는 비록 정국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정국에, 특히 노론벽파세력에 가히 메가톤급의 충격파를 안겨주었다. 정국의 뜨거운 감자인 사도세자 사건이 언제든 공론화 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1793년(재위 17년) 1월 16일, 수원화성을 도성에 버금가는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3년 동안 독상정부를 이끌었던 자신의 ‘오른팔’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최측근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일개 고을의 수령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야말로 화성건설이 정조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인사였다. 자연히 조야에선 정조의 의도를 묻는 여론의 압박이 거세졌다. ‘임금이 노론을 다 죽이려드는 것 아닌가’라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화성에 장용영 외영이라는 최고의 친위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다 대규모 국영농장과 실업기반 등이 속속 들어서는 것에 대하여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만일 이곳에 성곽이라도 쌓아 올린다면 이 도시는 천하의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요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 이곳을 기반으로 자신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공세를 펼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화성유수부 축성만큼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임금은 화성과 장용영 설치에 ‘숨은 뜻’이 있음을 부쩍 강조해대고 있지 아니한가. 자신의 속내를 궁금해 하는 노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정조는 승부수를 던졌다. 더 이상 밀릴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사도세자처럼 죽음을 맞거나 정치적으로 죽은 목숨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조는 1793년(즉위 17년) 5월 화성유수 채제공을 다시 불러들여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승기탕’ 탕평책의 묘(妙)를 살려 좌의정에는 노론의 영수 김종수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영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발령장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른바 ‘천토(天討)상소’라는 걸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다. 그는 ‘천지간에 극악무도한 자들의 부자․형제와 그 인척들이 모두 벼슬아치 대장(臺帳)을 꽉 메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무함(誣陷- )했던 큰 수괴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사도세자가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낼 것’을 정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당시 채제공의 상소는 정조까지 ‘등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오싹해졌다〈정조실록〉’고 실토 할 정도로 쇼킹한 것이어서 노론벽파세력이 느낀 위기의식은 대단하였다. 채제공과 함께 좌의정으로 입각한, 채제공의 ‘영원한 맞수’ 김종수가 목숨까지 내놓고 이에 맞불 형식으로 강력히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노론은 자칫 큰 내분과 이탈에 직면하여 회생(回生)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김종수는 채제공의 ‘천토상소’가 국시(國是)를 바꾸려는 책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영남사람 만여 명을 즉각 불러 모을 수 있는 채제공이야 말로 반드시 변괴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역공을 펴는 한편 ’채제공은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성토하며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정조는 양쪽의 책임을 함께 물어 숙명의 라이벌이자 탕평책의 두 기둥인 ‘좌제공 우종수’를 함께 삭탈시켜버렸다. 임명한지 불과 10여일 만이었다. 어쩌면 채제공은 ‘천토상소’ 한방을 위하여 긴급 투입된 구원투수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해(1793년) 8월 이 같은 의혹이 일정부분 이유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정조가 대신들 앞에서 ‘채제공의 상소는 당론에서 나오거나 국시를 바꾸려는 음모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의리와 충성의 발로로서, 비록 국왕은 임오의리를 제기할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금등의 서’를 알고 있었던 채제공의 입장에서는 이를 제기하는 게 의리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라고 ’친절히‘ 변호해주는 한편 승지에게 ‘금등의 서’의 내용 중 두 구절을 베껴낸 작은 종이를 여러 대신들에게 ‘맛보기로’ 보여주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삭장(상제가 짚는 오동나무 지팡이)여 삭장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藤千秋, 予懷歸來望思.(정조실록, 17년, 8월 8일) 이 문서는 영조가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을 불러 비밀리에 전해주며 첫 왕비인 정성왕후의 신위 밑에 있는 요 안에 넣어 두도록 명한 것이었다. 여기서 ‘피 묻은 적삼(血衫)’과 ‘삭장 지팡이(桐兮)’는 영조 33년 정성왕후 거상(居喪) 때 사도세자가 쓰던 것으로 영조가 문 숙의의 모함에 빠져 사도세자 처분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물건이다. 그리고 내용인 즉, 영조가 노론세력의 모함에 의해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생부 사도세자가 무함으로 숨졌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해명되었고, 생부의 명예가 회복됨으로써 정조는 국왕으로서의 정당성이 제고되어 숙원사업인 화성축조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요컨대 노론 측에서 계속 화성축성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올 경우 ‘금등의 서’를 전격 공개하여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정조의 서슬 퍼런 승부수에 노론벽파가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상불 그즈음 들어 정조는 노론벽파를 숫제 ‘적’으로 간주하는 언행을 빈번히 하곤 하였다. 즉,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무리를 ‘우리 당의 선비(吾黨之士)’ 또는 ‘국가를 위한 편’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속(矯俗)의 대상’ 혹은 ‘역적의 편’이라 하면서 노론세력의 ‘전향’을 회유하고 위협하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사도세자의 능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이 같은 의도는 더욱 분명히 드러나곤 하였다. 1794년(정조 18년) 1월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능) 행차 시에는 ‘슬픔을 더욱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고 기운과 정신을 잃기까지’〈정조실록〉하는 등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곤 하였다. 국왕의 효심과 애통함에 대한 비상한 표출은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정치적 원죄’를 진 노론 벽파의 위기감을 크게 자극하였다.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일부는 시파로 전향하였고 안동김씨 가문도 이때 시파로 돌아섰다고 한다. 정조는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이듬해(1794년) 정월 채제공을 다시 화성성역 총리대신으로 복직시켰다. (이는 정조가 정권을 영위함에 있어 채제공, 더 나아가 남인세력에 얼마나 의지하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 시파를 ‘남인시파’라고 부르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리고는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 화성 축성공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